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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을 사랑해야 한다면

W. 개굴

불시착한 전투기를 본 적이 있다. 채 탈출하지 못하고 적진으로 떨어져버린 전투기 조종사. 간첩 딱지가 붙어 고된 길만이 남은 그를 수용소까지 직접 후송했었다. 왜 낙하산으로 탈출하지 않았지? 고도가 낮은 것도 아니었는데.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궁금증을 던지면 전투기 조종사는 바람 빠지는 웃음을 웃었다. 글쎄. 왜일까. 그는 썩 암울하지 않은 목소리로 운을 뗐다. 그럴 때가 있는 거야. 이 길을 선택하면 어떻게 될지 결과가 빤히 보이는데도 그럴 수밖에 없을 때. 이봐, 친구. 전투기에는 나 혼자만 있던 게 아니야. 다른 친구가 하나 더 있었지. 낙하산은 하나 뿐이었고, 나는 그 친구를 탈출시켰어. 왜 그랬을까? 역으로 날아든 질문에는 딱히 답하지 못했다. 왜지? 그가 더 중요한 인사라서? 그가 탈출하는 게 더 수월해서? 수용소에 도착할 때까지도 마땅한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하고 수용소에 전투기 조종사를 넘기는 순간. 그는 이런 말을 했다.

-그래도 나는 불시착한 걸 후회하지 않아.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해야 한다면]



브리핑은 끝날 기미가 안보였다. 브리핑이란 본디 간단하게 읊는 게 아니던가. 이민호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옆에서 김우진이 옆구리를 쿡 찔렀지만, 뭐 어쩔 거야. 전쟁 통에도 하품은 나오는 게 인간인 것을. 무엇보다 브리핑이 이렇게까지 늘어진다면 브리핑을 하는 사람이 문제 있는 것은 아닐까? 잘생긴 얼굴로 빙글빙글 웃으면 김우진은 한숨을 폭 쉬었다. 내가 너 때문에 앓느니 죽어. 맞은편 앉은 한지성이 고개를 처박고 웃자 그 옆에 앉은 방찬이 머리를 쥐어박았다. 평화롭네. 전쟁 통에 할 생각은 아녔다.

이민호는 가이드였다. 가이드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인재였다. 가이드로서의 능력은 물론이고 상황판단능력, 전투능력, 신체능력 등이 모두 상위 등급에 랭크되어 있었다. 그는 이 혼란의 시기에 꼭 맞춰 태어난 것처럼 전장을 휘저었다. 센터에 처박혀 내리 훈련만 받다가 처음 투입된 전투에서 승리에 혁혁한 공을 세운게 그였다. 그 이후의 무수한 전투에서도 무모하게 보일만큼 달려들어 멀쩡하게 살아돌아왔다. 그 꼴을 가만히 지켜보던 방찬은 혀를 내둘렀다. 저런 겁을 상실한 놈. 이민호는 그냥 수긍했다. 그는 정말로 무서운 게 없었으니까.



=



인류가 역사상 유래 없는 평화를 100년째 유지하는 동안 지구의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인구는 자꾸만 늘고, 자원은 계속해서 줄고. 세계의 경제가 무너지고 환경은 끝없이 망가지던 때. 더 쥐어짜낼 곳도 없이 내 코가 석자라면 전쟁같은 건 언제든지 터질 수 있는 시기였다. 무기는 이이상 발전하기 어려울 만큼 발전되어 있었다. 남은 건 명목뿐이다. 전쟁을 일으킬 핑계. 누가 먼저 시작하게 만드느냐의 눈치싸움. 모두 입으로는 NO WAR를 외치면서 등 뒤로는 무기를 한가득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런 시기에 바닷가 작은 나라에서 내전이 일어났다. 본디 잦은 내전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나라였다. 전쟁이 으레 그렇듯 이념과 이해관계에 의한 충돌이었다. 다만 평소와 다른 것이 있다면, 내전이 길어질 기미가 보인다는 거였다. 내전은 2년이 넘는 시간동안 계속되었다. 한동안 강 건너 불구경만 하던 주변국들은 이게 기회다 싶었다. 도와준다며 자꾸만 병사를 파견하고 무기를 공급했다. 그럼 눈치만 보던 다른 국가도 병사를 파견했고, 질세라 또 다른 국가도 무기를 공급했다. 내전의 규모는 자꾸만 커져갔다.

그러던 와중에 사건이 터졌다. 대립하던 두 세력 중 A파의 우두머리가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당한 것이다. 사인은 익사. 물이라곤 갈증에 잠이 깼을 때를 대비해 놓아둔 물 한 컵이 고작인 방에서, 익사. 센티넬을 동원한 것이 분명했다. 센티넬까지 끼어든다면 통제가 너무나 어려우니 센티넬은 동원하지 말자. 센티넬이 동원되었던 과거의 전쟁을 통해 암묵적으로 합의한 내용이었다. 내전이 잦았는데도 어떻게든 추스릴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는데, 지금에 와서 센티넬을 고용하다니. 분노한 A파는 가능한 모든 병력을 동원해 Z파를 공격했다. 위기를 느낀 Z파는 결국 주변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바로 그것만을 노리고 있던 주변국은 그에 냉큼 응했다. A파 역시 주변국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전쟁은 삽시간에 전세계로 번졌다. 나라들은 서로의 이해관게에 따라 편을 가르고 서로 더 많은 이득을 취하기 위해 무기를 날려댔다. 자연스럽게 센티넬까지 동원되면서 지루한 전쟁이 시작됐다.



이민호는 고아였다. 이제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어린시절부터 고아원에 있었다. 그래도 이민호는 서럽지 않았다. 저를 세상에 버린 이들의 정보를 알기나 하면 왜 날 버렸느냐 원망이라도 할텐데, 얼굴도 이름도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으니 원망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는 게 맞았다. 허공에 대고 화풀이 해서 뭐 해. 누군가 저를 더러 고아라 놀리면 너도 언제 고아가 될 지 모르니 각오라도 해두라고 답해 되려 울려버리는 게 이민호였다. 가진 게 없으니 잃을 게 없고, 잃을 게 없으니 무서울 것도 없던 꼬맹이.

그런 이민호가 가이드 판정을 받은 것은 열여섯의 겨울이었다. 바닷가 작은 나라의 갈등이 2년 간의 내전 끝에 결국 세계로 퍼져버렸던 계절. 제 앞으로 날아든 검사결과를 보던 이민호는 콧방귀 불었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매사 시큰둥한 구석이 있는 이민호치곤 생소한 반응이기는 했다. 귀찮을 바에 센티넬이든 가이드든 발현되는 게 낫다는 생각을 이번 검사에서도 하긴 했지만,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이 발현될 줄은 몰랐네. 전쟁에 투입할 인력차출을 위해 진행된 특별검사에서.

이 세계에는 손가락이 열개든 열한개든 다리가 한짝이든 두짝이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받아야하는 검사가 있었다. 10세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센티넬 및 가이드 적성검사. 이때 일반인 판정을 받아도 5년에 한번씩 검사를 받아야했다. 발현시기가 모두 제각각이기에 정기적인 검사가 필요하다는 게 이유였다. 검사과정은 복잡하고, 길었고, 귀찮았다. 귀찮네. 이렇게 귀찮을 거면 뭐가 됐든 한번에 판정 받는 게 낫겠다. 열살의 이민호는 팔에 무자비하게 꽂히는 바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검사가 마지막입니다. 간호사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내용을 분명히 아까도, 그 아까도 들었는데. 순 사기꾼들 아냐. 그래도 이번만큼은 정말 마지막이었던 모양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영혼 없는 인사를 들으며 센터를 나섰다. 대낮에 왔는데 밖은 벌써 해가 저물고 있었다. 정말 귀찮네, 이거.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민호가 가이드 판정을 받게 된 건 이 일을 세번 반복한 후였다. 어이가 없네. 이민호는 손에 쥔 검사결과를 저리 던져버렸다.

그래도 이민호는 센터에서의 생활에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딱히 본인이 적응하려 한 건 아니고, 시키는 거 열심히 했더니 적응 잘한다는 평가가 따라왔다. 고아원서 학교 다닐때도 1등을 놓쳐본 적 없는 이민호였다. 그때도 그랬다. 1등을 하려고 공부한 건 아니고, 그냥 할 게 너무너무 없어서 공부를 했더니 1등이 따라왔다. 다른 건 다 괜찮아도 따분한 건 견디기 힘들었으니까. 훈련도 마찬가지였다. 가이드가 됐다고 갑자기 할 게 막 생기는 건 아니라서 주어진 훈련을 하고 또 했더니 우수 훈련병이 되어 있었다. 대우는 나날이 좋아졌다. 훈련에 들어오는 간부마다 입버릇처럼 말했다. 넌 이제 가이드 등급만 높으면 탄탄대로 달리는 거야. 이민호는 그냥 씨익 웃었다. 그래봐야 인간병기밖에 더 되나요. 별로 욕심 없어요. 따지자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뭔가 욕심내본적 없다는 게 맞았다. 시건방진 말을 겁도 없이 막 던질 수 있는 것도 그래서였다. 가진 게 없으니 잃을 게 없고, 잃을 게 없으니 무서운 것도 없던 꼬맹이는 고대로 자라 재수없는 청소년이 되어 있었다.

“재수없는 새끼.”

그러니까 면전에 대놓고 저런 말도 듣지. 이민호는 입 안에 든 내용물을 꼼꼼히 씹으며 생각했다. 쟤가 누구더라. 아까 훈련할 때 엎어치기 한 앤가. 아니면 명치 때린 애? 어느 쪽이든 딱히 제 잘못은 아녔다. 저는 훈련에 충실했을 뿐인 걸. 훈련 끝나곤 악수도 건넸다. 그걸 무시한 건 상대였다. 고로 제가 맘에 안들어 시비거는 게 분명하지. 이민호는 그냥 씩 웃었다. 그리곤 한마디 던진다. 어, 미안. 맥락에 맞는 말도 아녔고 전혀 미안하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해서 인간 본성도 어디가는 건 아녔다. 특별한 인간들 모아놨다는 센터에도 우수 훈련병 이민호를 질투하는 이들은 발 뻗으면 채일 만큼 많았다. 훈련에 미친 놈이라느니, 상부에 잘보이려 안달이 났다느니 하는 험담들이 꼬리처럼 따라 붙었다. 이민호는 그냥 귓구멍이나 팠다. 익숙한 일이었다. 다만 생소한 건, 저 좋다고 따라붙는 사람도 생겼다는 거였다. 이민호와 같은 시기에 센터 들어온 한지성이 그 중 하나였다. 혼자 냠냠짭짭 밥 먹는 이민호의 앞에 앉아 다짜고짜 지껄이던 한지성. 형 멀쩡하게 생겨서 왜 그렇게 돌았어요? 형 욕이 센터에 아주 깔렸던데. 이민호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낸들 아니. 내가 잘생기고 잘하니까 싫은가보지. 근데 너 나보다 동생이니? 한지성은 와하하 웃었다. 진짜 재수없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며 손도 내밀었다. 이민호는 네 맘대로 하렴, 샐쭉하게 답하곤 밥이나 마저 씹었다.



=



그는 아무리 험한 전장에 나가더라도 늘 멀쩡하게 살아돌아왔다. 이번 역시 그랬다. 소대장의 호출에 나설 채비를 하는 이민호 옆에서 한지성이 툴툴댔다. 아마 이번에도 말 몇마디로 때울 모양이지. 하여튼 양아치같은 새끼들. 방찬 역시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정식 병사가 되고, 가이드 등급이 뜰때까지만 해도 나날이 좋아지던 대우는 어느 순간 제자리 걸음만 반복하고 있었다. 뭐, 이정도면 부족한 거 없지만 제가 세운 공을 생각하면 좀 약하긴 하지? 이민호는 실실 웃으며 동조했다. 맞아, 순 양아치 같은 새끼들이야. 진심이었다. 그런데 한지성은 이민호에게 소리를 빽 지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 가서 항의라도 해! 대체 뭐야? 매번 목숨 걸고 나가서 그만한 공을 세우는데 몇 마디로 때우는 게 말이 되냐! 방찬이 식식대는 한지성을 달랬다. 그러더니 한마디 거드는 것이다. 지성이 말도 맞아. 너도 받을 건 받아야지. 그게 뭐가 됐든. 진지한 얼굴이다. 저렇게까지 진지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이민호는 모자까지 반듯하게 쓰고 나서 입을 열었다.

“그런 거 받아서 뭐 해. 별 필요도 없는데.”



소대장은 이제 너무 많이 읊은 나머지 똑같아진 칭찬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민호는 얌전히 뒷짐지고 서서 그걸 들었다. 지겹네. 늘 똑같은 말이 순서만 바뀌어서 나열된다. 이제 영혼 없는 칭찬 1, 3, 4, 7이 나왔으니까 2, 5, 6만 남았다. 이민호는 다음 순서를 2로 점쳤다.

“자네가 어서 상성이 맞는 센티넬을 찾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아, 틀렸다. 아주 가끔 영혼 없는 칭찬 아닌 진심이 섞여나왔다. 물론 이것도 신선하진 않았다. 그들의 진심이란 어떻게 해야 저를 더 뽑아먹을 수 있을지에 관한 것들이었다. 지겹네. 그리고 괘씸하다. 아무리 제가 욕심 내는 거 없다지만, 이만큼 굴려먹고 입으로만 떼우면서 더 굴려먹지 못해 안달이 난 저런 진심. 훈련병일때 간부들이 지겹게 했던 말들은 역시나 다 개뻥이었다. 뭐? 이제 등급만 높으면 탄탄대로를 달려? 웃기고 있네. 속일 사람을 속여야지. 공이고 뭐고 결국 상사 눈에 들어야 한다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가 다 알았다. 그렇다고 상부에서 저를 미워하는 건 아녔다. 이렇게 욕심 없고 잘 구르는 장기말이 어디에 또 있다고. 다만 지금은 괜찮지만 제가 더 치고 올라가면 위협이 된다는 뜻이렸다.

“저는 지금이 좋은데요. 혼자서도 충분한 성과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부족하십니까?”

이민호가 씩 웃으며 대꾸하면 소대장은 마지못해 맞장구를 쳤다. 아직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모양이었다. 아까했던 말들을 또 한 번 나열하더니 두어번 헛기침 후에 이만 나가보라며 손을 내젓는다. 하여튼 양아치같은 새끼들. 툴툴대던 한지성이 떠올랐다. 맞아. 맞는 말이지. 그들의 태도가 꼴같지도 않아서 지금의 상태가 더 좋은 거였다. 가이드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인재 이민호는 아직 상성에 맞는 센티넬을 찾지 못한 채였다. 국가는 그게 아까워 미칠 노릇이겠지만, 엿이나 먹으라지. 저는 이대로 평생 센티넬이 없어도 아무 문제 없다. 오히려 그 편이 좋다. 누굴 엿먹이기 위해서든, 자신을 위해서든. 센테넬 같은 건 있어봐야 어차피 혹 아닌가. 딱히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취미는 없다. 저는 센티넬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제 한 몸 제가 건사할 수 있으면 됐다.



이민호는 굳이 따지자면 이순간을 싫어했다. 센터 의료반 소속 김우진 씨의 잔소리가 너무나 극심한 탓이었다. 저보다 고작 한 살 많은 전담의께서는 늘 열 살은 많은 늙은이처럼 잔소리를 해댔다. 우와, 진짜 징글징글해. 하지만 그렇다고 치료를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는 고급인력이었기 때문에 그 명성에 걸맞는 활약이 필요했다.

“너 이러고 다니는 걸 찬이랑 지성이도 알아야 하는데.”

김우진은 죽 긁어먹은 옆구리를 보며 혀를 쯧쯧 찼다. 이민호는 속 편하게 웃고 있지만, 저거 아프지 않을리 없지. 잘생긴 얼굴이 빙글빙글 웃었다. 그게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어서 부러 상처를 꾹 눌렀다. 온몸을 습격하는 고통에 도마 위의 생선처럼 펄쩍 뛰는 몸.

“아, 형!”

솔직히 말해 쌤통이었다.

무서울 게 없어 망설일 것도 없는 이민호라도 어쩄든 인간이었다. 살이 찢기면 피가 나고, 그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존재란 뜻이다. 그런 것 치곤 겁이 없어도 너무 없지. 그러니까 그렇게 미친 놈처럼 돌진할 수 있는 거였다. 김우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매일 전장에 나가 구르는 주제에 시허연 몸은 이런 저런 흉터로 빽빽했다. 게중에는 제법 치명적인 흉터들도 있었다. 바로 오늘. 예쁘게 찢어먹은 옆구리도 꽤 큰 부상이었다. 이런 상처를 가지고 안 다친 척을 할 수 있단 말이야? 아무도 이걸 모를 수 있다고?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현상이었다. 근데 그게 현실이라는 건 더 이해가 안됐다. 한지성이고 방찬이고, 옆에 붙어 있어봐야 아무 쓸모도 없다. 어떻게 이런 상처를 몰라. 물론 이걸 그렇게 감쪽같이 숨길 수 있는 이민호가 제일 독종이었고 또라이였다. 김우진은 쯧쯧 혀를 찼다. 그리곤 늘 하는 말을 오늘도 입에 올리고 마는 것이다. 하여튼 감당 안되는 놈. 360도 돌아버린 새끼.

“제발 몸 좀 사려라. 너 그러다 죽어.”
“죽지 뭐.”

그런 이민호.



=



그런 소문을 들었다. 폐쇄된 9구역의 제일 큰 폐건물 지하 다섯번째 층에는 용이 잠들어 있다는 소문.



“기지를 옮긴다.”

저녁식사시간을 앞두고 열린 회의의 핵심내용은 저거였다. 기지를 옮긴다. 이주 전의 전투로 탈환했던 곳의 정비가 완료됐다고. 센티넬을 투입해 싹 쓸어버렸다던 곳이었다. 듣기론 적군이 전멸했다고 했는데 귀신 나오는 거 아냐? 한지성이 헛소리를 했다. 이민호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문제는 저녁도 먹지 않고 당장 준비를 하라는 거였다. 밤에 이동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건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제대로 된 저녁도 먹지 못하는 건 짜증이 난다. 누구라도 한대 때리고 싶은 표정으로 짐을 싸고 있으면 한지성이 다가와 속살거렸다. 근데 왜 기지를 옮겨도 하필 8구역이지? 이민호로서는 뜬구름같은 소리였다. 별로 대꾸할 의미를 찾지 못해 짐이나 마저 챙겼다. 한지성은 아랑곳않고 중얼거렸다. 8구역이면 바로 옆에 9구역 있는 곳이잖아. 용이 잠들어 있다는.

“헛소리.”

결국 끝까지 무시하진 못하고 픽 웃었다.



기지를 옮긴 이후부터는 놀라울 정도로 할 일이 없었다. 전쟁이 일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첫 전투부터 지금까지 장장 4년의 전쟁을 겪는 동안  몇 번 있었던 일이었다. 뭐, 전쟁 안하면 좋지. 다만 좀이 쑤셨다. 뭐가 어찌되든 다 괜찮은 이민호지만 따분한 것 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이주 내내 훈련장에서 살던 이민호는 오늘에 와서 결국 탈출을 감행했다. 모두가 잠든 새벽 세시. 여섯시까지 돌아오기엔 충분하겠지. 당연히 탈영은 아니고, 그냥 가벼운 산책. 물론 기지 밖을 산책한다는 게 가볍지 않기는 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그냥 몸 좀 풀고 올게요. 담장 밖에 선 이민호가 벽에 대고 꾸벅 인사했다. 탈출 계기는 오늘 낮의 식당에서 들었던 이야기 하나였다.

이 난리에도 따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이민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고 있었다. 앞에 앉은 방찬은 밥을 두그릇째 먹고 있었고, 옆에 앉은 한지성은 아직 한그릇도 채 못비웠다. 고개를 반바퀴 돌리면 의료반 김우진씨가 그쪽 동료들과 떠들며 밥을 먹고 있었다. 평화롭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풍경이었다.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차라리 꿈같았다. 스르륵 눈마저 감길 뻔했다. 이야기 하나가 귀를 파고든 건 그때였다. 야, 근데 9구역 너무 음산하지 않냐. 밤에 그쪽 바라보면 꼭 뭐라도 나올 것 같다. 대단한 이야기라도 하듯 속삭이는 목소리. 거리도 꽤 떨어져 있는데 왜 굳이 거길 쳐다보고 자빠졌어. 웃기는 소리 한다는듯 비웃는 목소리. 거기 진짜 음산하긴 하더라. 기운이 안 좋아. 옆에서 거드는 또 다른 목소리. 웃기지들 말고 밥이나 먹어. 배부르고 등따시고 여유로우니까 별 헛생각들을 다 하지? 다시 방금 전의 비웃는 목소리. 아니, 근데. 거기 진짜 이상해. 소문도 막 귀신 나온다는 거면 그러려니 하는데, 무슨 용이 잠들어 있느니 마느니…. 다시 돌아 처음의 그 목소리. 아. 이민호는 문득 기억 하나를 떠올린다. 아마 한지성도 그랬지. 폐쇄된 9구역의 제일 큰 폐건물 지하 다섯번째 층에는 용이 잠들어 있다고. 순 헛소리라고 생각하지만 상황이 이토록 따분하다면 뭐라도 하고 싶었다. 그 무엇이 제법 큰 위험을 수반한다 하여도. 아니. 위험하다 해도 저라면 살아돌아올 것 같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점심 이후에는 내내 기지를 탈출할 궁리만 했다. 마음 같아서는 소대장님, 저 잠깐 9구역에 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싶었지만 당연히 가능할리 없지. 하여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한지성이 별일로 훈련을 안한다고 참견을 했다. 석달 내내 훈련했으니 그냥 돌아다니련단 말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람이 그럴 때도 있어야지. 전투야 어쩔 수 없다손 쳐도, 지금까지 매일 훈련을 하다니. 난 형이 훈련광인줄 알았잖어. 한마디 던지면 최소 세마디 돌려주는 애 답게 뒷말이 길었다. 이민호는 잘생기게 웃으며 방을 빠져나갔다. 저거 다 듣다간 십분은 걸릴 게 눈에 훤해서였다. 방을 탈출하고 나서는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며 순찰 경로, 교대 시간 등을 꼼꼼히 파악하고 다녔다. 비밀 작전이라도 수행하는 것 같네. 나쁘지 않았다.



“와. 분위기 장난 아니네.”

낮에도 썩 좋은 기운 풍기는 곳은 아니지만 밤에 보니 더 장난 아니다. 어디 보다 뿐인가. 직접 마주하고 섰는데 아무리 이민호라도 조금 망설여졌다. 자, 생각을 하자. 여기가 전장이라면? 어디서 어떤 공격이 날아들지 경우의 수를 파악해서 최적의 동선과 공격을 출력하고 다음 행동을 대비하면 된다. 어려울 것 없다. 다를 것도 없다. 심호흡 후에 결국 발을 뻗었다. 뭐, 별 일이야 있겠어. 어차피 인생 죽기 아니면 살기인 것을.

건물 내부는 고요했다. 감시하는 낌새도 없다. 긴장한 것에 비해 너무 순조로워 김이 빠진달까. 순식간에 찾아낸 엘레베이터에 안내판이 붙어있었다. 지상으로 7층, 지하로 3층. 전층운행. 한지성의 말로는 분명 지하 5층이라 했다. 그런데 전층운행이라 안내된 엘레베이터는 지하 3층을 가장 아래층으로 표시하고 있었다. 소문이 완전히 헛소문이거나, 정말 지하 5층에 용이 잠들어 있거나 둘 중 하나는 증명해 보일 수 있다는 소리였다. 이민호는 일단 엘레베이터 옆에 위치한 비상계단으로 지하 3층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위험요소는 딱히 없어보였다. 만약 1층에서부터 침입자를 차단하려 했다면 cctv든 적외선 탐지기든 인기척이든 있었을테고, 지하층 전부를 모종의 이유로 사용하고 있다면 안내판이나 비상계단 입구를 버젓이 표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제 판단이 모두 틀렸고, 침입자를 구석의 구석까지 몰아 확실히 제거할 생각이라면? …역시 그냥 죽지 뭐. 어떻게든 죽일 계획이라면 이미 이 곳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벗어날 수 없을 터였다.

지하3층까지 내려가는 것 역시 수월했다. 수월하다 못해 따분했다. 비상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게 전부였다. 다만 여기서 비상계단이 끝나버렸기 때문에 또 다른 통로를 찾아야했다. 이제 이 층에서 판가름이 나겠지. 이 밑에 층이 있을지 없을지. 이민호는 지하 3층 안으로 조심스레 발을 딛고 당장 시야에 닿는 부분을 모두 훑었다. 일단 적외선 탐지기에 걸리는 것은 없다. 문제는, 탁 트인 지하공간에 비상계단이 위치해 있을만한 곳이 딱히 짐작가지 않는단 거였다. 꼼짝없이 바닥이며 벽을 훑어 비밀의 문을 찾아야한다는 거군. 만약 여기서 비밀의 문을 찾지 못한다면 시간은 버리되 무사복귀할 확률이 올라간다. 하지만 비밀의 문을 찾는다면 시간 버린 보람은 있되 안전에선 한발짝 멀어진다. 이민호는 10초간의 짧은 고민을 마쳤다. 그는 딱히 안전주의자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방금 깨달았다. 가장 숨기고 싶은 것은 가장 가까운 곳에 두는 법이다. 이민호는 발 밑을 살짝 두드렸다. 비어있는 소리가 났다. 소문은 이제 반쯤 들어맞고 있었다.

비밀통로는 깊었다. 지하4층을 그냥 통과하도록 만들어 놓은 모양이었다. 이러니 한 층 더 수상하다. 정말 용이라도 맞닥뜨리는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런 건 시뮬레이션에서도, 실전에서도 겪어본 적 없는데. 아래로 내려갈수록 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그것은 이민호가 곧 지하5층에 도달한다는 의미였고, 지하5층엔 기어이 비밀스런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걸 뜻했다. 내려가자마자 이마에 총이 겨눠지는 건 아닐까. 이민호는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게 다인가?”

허-. 허탈함에 진이 다 빠졌다. 이민호는 적외선 탐지기를 벗었다. 감춰놓은 공간 치곤 이상하리만큼 보안이 허술한 곳이다. 긴장한 보람도 없이 공간마저 휑했다. 소문대로 지하 5층이 있기는 있는데, 왜 있는지 도통 그 목적을 알 수가 없었다. 텅 비어서 그저 넓기만한 공간. 불이 켜진 것을 봐선 분명 누군가 사용한다는 뜻일 텐데 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사용하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발걸음을 옮기자 찰박 소리가 났다. 물이다. 이 수상하고 깔끔한 지하공간 한복판에 있기에는 너무 뜬금없는 것이었다.

“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닥의 물이 이민호에게 달려들었다. 말 그대로, 바닥에 고인 물이, 이민호를 덮쳤다. 와, 이건 뭐지? 너무 말이 안되니까 상황파악이 안됐다. 과학이 제멋대로 사람을 공격하는 물까지 만들었단 얘긴 아직 못들었는데. 박터지는 생각을 하다가 저 구석 철창 안에 있는 뭔가를 발견했다. 어둠 속의 실루엣은 분명 사람이었다. 그래. 사람. 쟤구나. 쟤가 센티넬인거야. 자연을 다룰 수 있는 능력. R등급 센티넬일 터였다.

“잠깐…! 잠깐만 멈춰!”

알고 있다. 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센티넬. 전장에 가면을 쓰고 나와 수해를 퍼붓던 장본인. 어느 날 갑자기 쥐도 새도 모르게 사망처리된 '그' '센티넬 용병'. 통칭 수룡(水龍). 그런데 왜. 그 센티넬이 저 얼굴을 하고 있는지.

“필릭스…!”

이민호가 다급하게 그 이름을 외친 순간.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



“형 뭐야?”
“뭐가.”
“아침부터 훈련했어?”
“어-, 어어….”

와. 한지성은 경악스런 표정을 했다. 어제 무슨 바람이 불어서 훈련을 안한다 했더니 결국 오늘 아침부터 훈련을 하네. 진심으로 질린다는 표정이었다. 하하, 이민호는 그저 웃기만 했다. 한지성아. 내가 지금 훈련복을 입고 있지만 나는 사실 밤을 꼴닥 새고 이제 숙소에 들어왔단다. 하지만 간밤의 일을 사실대로 말 할 수는 없었다. 이민호는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눈치 빠른 놈이 먼저 둔하게 굴어줘서 다행이었다.

간밤의 만남은 꽤나 쇼킹했다. 왜 아니겠어. 99%쯤 헛소문이라고 확정하고 저지른 미친 짓의 결과가 소문의 용을 제 눈으로 확인한 것이었으니.

-나를. 알아요…?

오래된 기억 속에서 끌어올린 이름에 반응한 목소리는, 너무 제멋대로 갈라져서 정말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해도 믿을 법 했다. 이민호는 조심스레 철창 앞으로 다가갔다. 곧 부러질 듯한 손목이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손목이라 해도 믿을법한 발목엔 족쇄. 옷인지 거적인지 모를 것 사이로 드러난 몸엔 흉터가 가득했다. 소문으로 듣던 '용'의 몰골은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쇼킹했다. 분명 제가 아는 얼굴이 맞는데, 제 기억 속의 얼굴과는 또 달랐다.

“왜…, 네가 이런 곳에 갇혀있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으면,

“나를 알아요?”

저를 아냐는 말만 되풀이 하는 용은 분명히 이민호 기억 속의 그 소년이 맞았다.



언제였더라. 술에 만취한 소대장놈을 모시러 향락촌을 드나들던 때가 있었다. 2년 전. 스무살때였다. 온통 붉은 등이 가득하던 곳을 드나들때면 이민호는 늘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의 인류는 발전도 없지. 그러니 전쟁 통에도 술과 향락을 못 잃는 놈들이 상전이랍시고 떵떵거리고. 이민호는 굳이 따지자면 세상 잘 굴러가길 바라는 마음이 있는 건 아녔다. 그래도 사람이 하루에 수십명씩 죽어나가는데 전쟁 끝낼 생각은 않고 개짓거리나 벌이는 걸 상전이라고 모셔야 하는 현실은 눈물이 났다. 꼴에 죽기는 싫어서 병력을 동원해 순찰을 돌리는 꼴이 아주 웃기지도 않았다. 여길 폭파시키고 도망갈까. 실없는 상상은 1초 만에 관뒀다. 저런 건 저랑 별로 안어울리지. 그래도 능력 좋은 센티넬 하나 꼬셔서 쓰레기들만 제거해버리면 속이 시원하겠더란 생각은 했다.

소년을 만난 것은 그때였다.

쿵. 기척도 없이 다가온 무언가가 이민호를 들이받고 넘어졌다. 뭐야. 와서 부딪힌 건 저면서 튕겨나간 것도 그쪽이니 좀 황당하기도 했다. 이민호는 보기 좋게 넘어진 사람에게 손을 뻗었다. 드러난 어깨가 하도 말라서 저도 몰래 그랬다. 잠시 머뭇거리던 손이 제 손을 마주잡았다. 척 보기에도 작은 손.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작은 손인 저보다 조금 더 작은 손을 가진, …소년인가? 옷차림은 향락촌 사람이 맞다. 눈높이가 비슷한 게 흔한 여자키는 아니고. 예쁘장한 얼굴이 어리기까지 해서.

‘죄송합니다.’

아. 목소리가 너무 소년이네. 듣기에 썩 좋은 목소리라고, 그런 생각을 잠깐 했었다.



“야.”
“왜.”
“너 왜 그, 수룡 기억해?”
“수룡? 그렇게 음모론에 빠진 사춘기 락스타 같은 이름 가진 애는 내 기억에 없는데.”
“아, 말고. 왜 걔 있잖아. 물 다루던 센티넬.”

아, 맞네. 그런 애가 있었지. 쥐도 새도 모르게 증발한 애. 상부에서 죽었다곤 하는데 아무도 안믿었던. 소문이 많았는데. 센티넬로의 수명이 다했다던가. 센터에서 복제를 만들기 위해 실험실에 가뒀다던가. 아무튼. 그게 3년 전인가 그랬지. 한지성은 제가 아는 정보를 줄줄이 쏟아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까진 저도 아는 거고.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이민호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근데 걔는 왜.”
“어엉?”
“그런 걸 왜 물어봐 갑자기. 요전에 내가 용 어쩌구 할땐 헛소리라며.”
“아니, 그냥 궁금해서…. 근데 넌 그 용이 여기서 왜 나와? 내가 물어본 건 수룡인데.”

한지성은 콧방귀를 팽 불었다. 아주 가소롭단 태도였다. 자, 내가 이제부터 형이 할 말을 읊어볼게. 그리곤 눈에 힘을 줘 쌍꺼풀을 만든다. 저거 내 눈이라고 따라하는 건가. 이민호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한지성이 훅 치고 들어왔다.

“야, 나는 그냥 니가 용 타령하던 게 갑자기 생각나서, 어? 그거 듣다보니까 수룡이라는 게 있었지, 해가지고 물어본 걸 뭐 그리 깊게 생각하냐.”
“…….”
“틀려?”

이민호는 대답 대신 한지성의 동그란 볼따구를 꼬집었다. 하여튼 눈치 빠르고 얄미운 놈. 한지성이 죽는다고 엄살을 부렸다. 심지어 그렇게 얄밉게 굴어놓고 한지성은 정말 아는 게 없었다. 결국 뭐가 궁금하면 본인에게 직접 물어야 한다는 뜻 되시겠다. 또 아슬아슬한 밤산책을 감행해야겠군. 오늘은 조금 더 이른 시간에 나서보기로 마음 먹었다.



‘오, 자네 왔군.’
‘…네.’

이민호는 잠시 굳었다. 어김없이 술에 취한 상사놈을 모시러 갔는데 어제 걔가 앉아있어서. 그쪽도 저를 알아보고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사놈은 그 마른 어깨를 감싸고 뭐가 좋다고 웃었다. 저렇게 어려보이는 애한테 술따르게 시키고 싶냐. 새삼 구역질이 올라왔다. 많이 취하셨습니다. 어서 가시죠. 성큼 방 안으로 들어선 이민호는 그때까지도 어깨를 감싼 손부터 떼어냈다. 불편하게 앉아있던 어제 걔가 얼른 거리를 벌렸다. 네가 고생이 많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니 걔도 저를 안쓰럽게 보고 있어서 픽 웃음이 났다. 군인 주제에 살이 이만큼 쪄서 몸도 제대로 못가누는 상사놈을 다소 빠듯하게 들쳐업자 걔가 얼른 방문을 연다. 고맙다, 짧게 인사하자 고개 숙여 인사하던 걔.

“너, 걔 맞지?”

다시 찾아간 그곳에서, 철창 안에 갇힌 걔를 보고 다짜고짜 물었다. 너 필릭스 맞지. …네. 너, R등급 센티넬, 수룡이고. 네. 하. 헛웃음이 터졌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걔가 걔다. 근데 네가 수룡도 맞고 필릭스도 맞으면.

“나 기억 안 나?”

왜 나를 몰라. 이민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철창 안의 동그란 눈이 저를 바라본다. 여전히 기억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죄송해요. 저, 기억이 조금 없어서.”

그런 말을 들으려고 물은 건 아녔는데. 용의 상태는 생각보다도 좋지 않은 듯했다.

이민호는 철창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디서부터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뭐부터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민호는 그냥, 혀에 걸리는 대로 지껄여보기로 했다.

“나는 너를 알아. 넌 수룡이야.”

이민호는 본디 육상전에 투입되는 인력이었다. 해상전이나 공중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 자리에서 살기도 빡빡하니 다른 데 관심을 가져볼 여유도 없었다. 뭐, 각자 알아서들 굴러가겠지. 그정도가 끝이었다. 그런 이민호가 딱 한 번 해상전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3년 전. 병력지원요청에 의해 참여한 전투에서. 훈련병에서 일반 병사가 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그 때 봤다. 적진의 뱃머리에 서서 정말 인간이 맞는지 의구심이 드는 능력을 구사하던 센티넬을. 척 보기에도 깡마르고 작은 몸으로 최전방에서 바닷물을 용처럼 다루는데, 와. 저건 진짜 엄청나네. 적이고 뭐고 그저 흥미가 동했다. 아군의 센티넬도 제법 휘황찬란한 능력을 구사했지만 눈길이 가는 건 적진이었다. 자꾸만 그 쪽을 보다가 등짝을 시원하게 긁어먹기도 했다. 방찬이 옆에서 소리를 질렀다. 너 정신 안차려! 총알이 아니니 망정이지!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꼴 겪어놓고도 눈이 자꾸 돌아가는 게, 정신이 돌아버린 게 분명했다. 얼마 가지 않아 결국 퇴각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었다면 지금쯤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그 이 후로는 해상전에 참여할 기회도 다시 오지 않아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수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건 저예요. 그 자리에 있었구나. 하지만 전 당신을 본 기억이 없는데요. 이민호는 멀뚱이 꿈뻑이는 눈을 보면서 당연한 소리 한다는 표정을 했다. 당연하지. 난 그때 너 구경하느라 힘도 못쓰던 병사1이었다고. 어? 네 능력이 그렇게 대단했는데, …. 다시 왜 여기에 갖혀있느냔 질문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이민호는 말을 돌렸다.

“그리고 넌, 필릭스야. 필릭스 리. 이필릭스.”

이필릭스가 또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첫 만남이 두번째 만남이 되고, 두번째 만남이 세번째 만남이 되면 좀 궁금해지기는 했다. 어떻게 이 좁지도 않은 곳에서 매번 마주칠 수 있지? 하지만 그걸 쟤한테 묻는다고 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고. 그냥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이나 한다. 야, 우리 계속 마주치네. 백마디는 더 나눈 사이처럼 자연스레 말을 건네던 이민호와 고개를 까닥이며 자연스레 대꾸하던 이필릭스. 오늘도 소대장님 찾으러 오셨어요? 익숙한 꼴을 본다는 듯한 질문이었다. 이민호는 그냥 볼이나 긁었다. 아니. 소대장 데리러 온 거 아니야. 아무리 썩어빠진 상사놈이라도 전쟁터에서 술병나 죽은 놈으로  기록되고 싶지는 않겠지. 그래서 출전을 앞둔 요며칠간 얌전히 숙소에 처박혀 있는 중이었다. 그럼 왜 오셨어요? 이필릭스가 다시 물었다. 아무 뜻없이 그저 궁금한 눈을 하고 있는데, 이민호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게. 내가 왜 왔지. 어디에 물어도 답을 듣지 못할 질문이 입 안을 멤돌았다.

“그건… 기억에 없어요.”

제가 아닌 것 같아요. 이필릭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신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어쩌다 네가 이렇게 됐지. 괜히 뱃속에서부터 울컥하는 걸 억지로 집어 삼켰다. 그래. 기억 못하면 다시 떠올릴 수 있게 도와주면 되지. 이민호는 애써 웃었다. 또 올게. 굳이 약속을 남기고 일어섰다. 이필릭스는 그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이민호를 바라봤다.



이민호는 이제서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위험을 수반한 밤산책이 사흘 차에 접어든 날이었다. 딱히 감시가 붙은 것 같지도 않고. 딱히 관리를 받는 것 같지도 않고. 근데 너 왜 여기 혼자 있어? 이필릭스는 눈만 멀뚱이 꿈뻑이다가 박터지는 소리를 했다. 어…, 저 감시하러 온 거 아녔어요? 참…. 쟤도 정상은 아니다. 이민호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야, 내가 감시하러 온 거면 굳이 이 야밤을 틈타 몰래 나오겠니.

“아…. 여긴 시간의 흐름을 알 수가 없어서요…. 죄송해요.”

이필릭스가 멋쩍은 사과를 건네는데 이민호는 짜게 식고 말았다. 네가 뭐가 미안하니. 그냥 내가 다 나쁜 놈이다. 이민호는 당장에 무릎을 꿇었다. 이런 꼴로 가둬둔 애한테 굳이 시간을 알려줄 리가 있겠냐. 내가 쓰레기다. 미안하다. 이민호가 왜 사과를 하는지 저만 모를 이필릭스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저도 무릎을 꿇었다. 왜 그래요. 그 꼴을 보고는 아예 바닥에 고개를 처박는 이민호. 손이 천장에 묶인 이필릭스는 저도 고개를 숙이겠다고 낑낑댔다. 볼만한 꼬라지들이었다. 근데 그러다 보면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너 여기 얼마나 혼자 있었는데? 대략 너 느끼기에.”
“음…. 한달 정도…?”
“…한달 동안 거기 꼼짝 없이 묶여서.”
“네.”
“밥도 못 먹고.”
“네.”

하-. 오는 점심에 밥먹었다는 말투로 대꾸하는데 차라리 웃음이 다 났다.

다음 날 방문했을 때, 이민호는 커다란 절단기를 하나 들고 왔다. 너 이리 와 봐. 바짝 와 봐. 그리곤 저도 철창 안으로 팔을 뻗었다. 절단기에 사슬이 걸렸다. 이제 끊어낼만큼 힘을 주기만 하면 되는데, 팔을 쭉 뻗어 힘을 주려니 시간이 좀 걸렸다. 아, 힘들다. 한달 만에 팔을 내리게 된 이필릭스는 뭐 좋다고 웃었다. 팔에 남은 수갑이 꼭 팔찌 같다나. 하여튼 정상은 아니다. 이민호는 쯧쯧 혀를 차다가 주머니에서 물병 하나랑 사과 하나를 철창 안에 넣어줬다. 한달을 굶었다니 물로 입 먼저 잘 적시고, 조금씩 마시고. 사과도 천천히 먹어. 탈 난다. 저도 다 아는 잔소리에 방긋 웃는 이필릭스. 마음 같아선 족쇄도 풀고 철창도 부숴버리고 싶었지만, 절단기 따위로는 어떻게 안되는 것들이었다. 기술력한번 빌어먹게 끝내주네. 험한 말은 입 안으로 삼켰다.

이민호는 뻔질나게 지하감옥을 드나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 몰라 혀에 걸리는 대로 지껄인 게 일주일째. 꼭 제가 한지성이 된 것만 같았다. 이필릭스는 이민호의 말에 열심히 반응하다가 이따끔 멍 때리기를 반복할뿐 제 이야기를 먼저 하지는 않았다. 결국 오늘치 지껄임을 다 쏟아내고 정적이 찾아왔다. 꼴이 엉망진창인 센티넬. 감시관이 없어진 게 한달 전인데 그 전부터 갇혀있었다 그랬지.

“근데 너 센티넬이면. 가이딩 없이 이런곳에 갇혀 있을 수 있어?”

R등급은 뭔가 다른가. 한달 동안 움직이지도, 먹지도 못하고 비교적 멀쩡하게 살아있었으니 그럴 수도 있나. 하지만 그건 너무 속편한 생각이었다.

“가이딩 유도제 써요.”
“…뭐?”
“한달 전에 맞은 게 마지막이라 효과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민호는 그제야 부러질 것 같은 목덜미에 자리한 바늘자국을 본다. 미친 놈들. 욕이 튀어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가이딩 유도제란 상성이 맞는 가이드를 찾지 못한 센티넬들이 폭주하는 건을 대비하기 위한 약물이었다. 하지만 장기파손, 기억상실 등 부작용이 심해 잘 쓰이지 않았다. 쓴다 해도 소량 투여 후 적당한 가이드가 가이딩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런 걸 맞아왔다고. 지금까지 계속?”

긍정을 담은 눈이 시선을 맞춰온다. 저, 기억이 조금 없어서. 이제 납득이 간다. 이민호는 그 눈을 더 마주하기 힘들어 눈을 감았다. 돌아버린 세상이다.

“내가 가이드거든.”

“내가 너한테, 가이딩을 해도 되겠니.”

이민호는 다시 눈을 떠 이필릭스를 바라봤다. 이필릭스는 어딘지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저, 가이딩 받아본 적 없어요. 매번 유도제만 맞아와서. 그딴 걸로 이날 이때까지 연명했다고. 이민호는 양손을 뻗어 이필릭스의 뺨을 감쌌다. 날 믿어. 유도제 같이 고통스럽지 않아. 내가 이래봬도 등급 높은 가이드거든. 그리곤 조심스레 제 입술을 이필릭스의 입술에 마주댔다. 바싹 마른 낙엽 같이 버석한 입술이었다.



전쟁이 일시 소강상태에 접어든지 두어달이 지났다. 그것은 이민호가 이필릭스를 만난지 한달하고도 보름이 다 됐다는 소리였다. 적지 않은 것들이 바뀌어 있었다. 일단 이필릭스가 이민호를 형이라 부르게 됐고, 매일 같이 질 좋은 음식들을 먹으며 제법 사람 꼴이 됐다. 손목에 남아있던 수갑은 이민호가 매일 같이 들쑤신 덕에 어떻게든 풀어졌다. 뭣보다 이필릭스가 조금씩 기억을 되찾고 있었다. 저건 가이딩 덕인가. 뭐, 아무래도 좋았다. 되찾은 기억이라는 게 고작 향락촌에서 있던 일인건 괜히 미안하지만, 이필릭스는 그때의 기억이 그리 나쁘지 만은 않은 듯했다. 꼭 이민호가 그런 것처럼.

향락촌을 조금 벗어나면 낮은 언덕이 있었다. 그 뒤로는 온통 지뢰가 심어져 있었고, 또 그 뒤에는 폐허가 된 땅이 보였다. 이필릭스와 말을 조금 튼 이후로 그 언덕을 몇 번 올랐었다. 그냥, 어디라도 도망치고 싶어서. 나란히 발걸음을 맞추면 십분만에 그 위에 다다랐다. 근데 그게 그렇게나 다른 세상 같았다. 밤하늘의 별이 온통 둘에게 쏟아지는 것 같은 풍경. 이필릭스는 그 풍경이 기억났다며 맑게 웃었다. 그리고 이민호는 그 얼굴을 따라 웃었다.

늘 웃을 이야기만 했던 건 아녔다.

형 최전방이라 그랬죠. 그거 별로 안좋지 않아요? 난 별로였는데. 근데 형 언제부터 최전방에 섰어요? 이필릭스는 참 쫑알쫑알 말이 많았다. 그떄는 별로 안그랬던 것 같은데. 이런 곳에 처박혀 있다 보니 사람이 그리웠던건가. 썩 좋은 건 아닌 것 같네. 이민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 나는. 훈련소에서 탑 먹다가 첫 투입된 전투에서 날아다녔어. 그리고 전투 몇 번 더 뛰니까 잘 싸우고 안 죽는다고 최전방에 세우더라. 요약하면 그런 내용이었다. 참 별 거 아니지. 근데 그 별 거 아닌 이야기를, 이필릭스는 참 열심히도 들었다. 그렇게 많은 전투를 치르고도 살아있다니, 형 진짜 대단하네요. 듣기 애매한 칭찬도 진심으로 했다. 이민호는 떨떠름하게 되받았다. 어…, 뭐. 너만 하겠니. 너도 대단해. 그러다 보니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다.

“네 첫 임무는 뭐였어?”

이필릭스의 첫 임무.

“아, 저는….”

듣기 좋은 목소리가 입을 열었다. A파 수장 암살 임무요. 이민호는 귀를 한 번 후볐다. 내가 잘못 들었나. 그리고 다시 이필릭스를 빤히 바라봐도 그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야. 농담하지마. 그게 몇 년 전 일인데. 너 그때 되게 어리지 않았어? 근데 진짜? 진짜로 그게.

“…그것도 너였어?”

네. 이필릭스는 해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근데 이민호는 전혀 그럴 기분이 아녔다. A파 수장 암살사건. 제 기억으론 저가 열여섯 봄여름쯤의 일이었다. 병력 보충을 위해 시행된 특별검사에서 가이드 판정을 받은 것이 열여섯 겨울이었으니 맞다. 그리고 이필릭스는 저보다 두살이 어리니까, 그 때 당시 열 네살.

“열 네살에, 암살임무를 받았다고…?”

이젠 기도 안찬다. 이필릭스에 대해 알면 알수록 더 그랬다. 7살때 센터에 들어가서, 7년 동안 죽어라 훈련만 받다가, 처음 센터 밖을 나선 이유가 암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란다. 개같은 세상이 아닐 수 없다.



이필릭스는 열살이 되기도 전에 센티넬로 발현했다. 아빠 손을 잡고 놀러간 공원에서 난생 처음 분수를 맞닥뜨렸던 날. 무수하게 쏟아지는 물줄기 밑에서 정신없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것은 이내 제 상상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점점 밖으로 퍼지던 물줄기는 이제 완전히 하늘로 치솟다가 하나로 합쳐져 공중에서 큰 원을 그렸다. 그게 마치 동화책에서 보던 용 같았다. 이필릭스는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그에 응하듯 하늘을 몇 번 더 돌던 용이 분수대에 내려 앉았다. 이필릭스가 분수대를 가리키던 순간이었다. 그래. 그 모든 것은 그 작은 손끝으로부터.

‘필릭스.’

아빠의 놀란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면, 모든 것은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그러게 애를 좀 잘 봤어야지! 어떻게 애 보는 것도 못해서 이 사단이 나게 만들어?! 엄마의 짜증 섞인 목소리. 나라고 필릭스가 센티넬인 걸 알았겠어? 아빠의 신경질적인 목소리. 쉴새없이 오고가는 날선 목소리에 기가 죽어 있으면 가족은 어느새 세번째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일주일 전, 급하게 짐을 챙겨 집을 떠난 뒤로 일주일째 차와 비행기, 배를 번갈아 타며 끝없이 어디론가 향하는 중이었다. 그 여정은 아주 피로했고, 오늘에 와서는 극에 달한듯했다. 그동안 주고 받던 날선 말들도 오늘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는 순간까지도 아빠는 꼭 이렇게 해야겠느냐 물었다. 엄마는 그만하고 싶으면 혼자 관두라는 말을 했다. 거기가 어떤 곳인데.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훤히 다 아는데 내새끼를 그런 곳에 처넣으라고? 내가 살아있는 한은 절대 안 돼.

-절대 안 돼.

총성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당신들은 이미 포위되었으며, 센티넬을 데리고 도망치는 것은 중범죄이므로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즉시 사살가능하다는 경고가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순순히 아이를 넘기면 이제까지의 잘못은 눈감아주겠다는 회유도 따라붙었다. 이필릭스는 창밖을 내다봤다. 트렁크 앞에 선 엄마와,  그 옆에 선 아빠. 차는 총을 든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팽팽한 긴장감은 어느 한쪽이 숙이기 전엔 느슨해질 일이 없어 보였다. 크게 심호흡을 했다. 제가 나서야지만 잠잠해진다는 걸, 일곱살짜리 어린애는 알고 있었다.

‘갈게요.’

작은 손으로 차문을 열고 내려 말했다. 제가, 갈게요. 따라갈테니까 내 가족은 모두 놔줘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엄마가 화를 냈다. 네가 나설 일 아니야! 어서 차에 들어가! 총이 엄마의 옆구리에 바짝 붙었다. 아빠도 덧붙였다. 그래, 필릭스. 일단 차에 들어가. 아빠의 등에도 총이 바짝 붙는 게 보였다. 제가 지금 차에 타면, 모든 게 다 없었던 일이 되나요? 일곱살짜리 어린애의 말에 엄마도, 아빠도 말문이 막혔다. 이필릭스는 아빠의 손을 꼭 잡았다가, 엄마의 품에 안겼다. 엄마에게 겨눠진 총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제가 가야만 해결될 일인 것 같아요. 고작 일주일 새에 너무 많은 것을 깨달아버린 일곱살짜리 아들의 말을 들으면서 엄마는 세상 가장 서러운 사람처럼 울었다.

‘필릭스!’

엄마는 전직 센티넬 및 가이드 연구를 위한 국제기구의 연구원이었다.



“그런 엄마가 그렇게 반대했으니, 얼마나 나를 이곳에 보내고 싶지 않았는지 알겠죠.”

이곳이 얼마나 지독할지도. 그때 멋모르고 나선 걸 후회할 때도 적지 않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요. 이필릭스는 담담하게 웃으며 마른 어깨를 으쓱였다. 이민호는 그냥, 마른 침이나 삼켰다. 그렇게 센터에 들어와서, 7년 동안 훈련만 죽어라 받다가, 14살에 맡은 첫 임무가 암살. 하. 개자식들 많은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개같을 줄은 몰랐다. 이민호가 한숨을 푹푹 쉬면 필릭스는 또 실없이 웃었다. 뭐 좋다고 웃냐. 너도 참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모르겠다. 제 동료들은 맨날 저를 더러 미쳤다고 하는데, 제 볼 떈 쟤도 만만찮게 이상했다.

“아, 저 아마 너무 어릴 때 그렇게 훈련받아서 몸이 크다가 말았나 봐요.”

그런 걸 농담이라고 하는 이상한 애.



어쨌든 기억이 계속 돌아온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그걸 공유할 수 있다는 건 더 좋았고, 아무튼 그냥 다 좋았다. 이민호는 생각했다. 내가 널 계속 만날 수만 있다면 어떤 형태든 좋은 것 같다고. 그때까진 그랬다.

“형. …저 생각났어요.”
“그래? 이번엔 뭐가?”

철창 앞에 자리를 잡자마자 날아든 말은 이민호가 기다려 마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 저도 모르게 들뜬 걸 내리 누르려 애를 쓰면 또 다른 말이 날아왔다.

“왜 여기에 갇혀 있는지.”

“명령불복종으로 반역죄 판결을 받았어요.”

“저 스파이였어요, 형.”

하늘을 날다가 가시밭에 추락한 기분이었다.

이민호도 들은 적 있었다. 악명 높던 센티넬 용병이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는 이야기. 물론 전쟁 통에 어느 날 갑자기 죽는 건 이상한 일이 아녔다. 이상한 건 ‘그’ ‘센티넬 용병’이 죽었다는 거였다. 전장에서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었다. 얼굴이야 늘 가리고 있으니 정확히 아는 이 없다 하여도, 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희귀능력을 가진 인물이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상부의 태도도 이상했다. 그만한 인력이 쥐도 새도 모르게 증발했는데 죽었다고 발표 한마디 던지고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소문을 믿지 않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죽었을 리는 없다. 다만 모종의 이유로 빼돌렸을 것이다. 그리고 모종의 이유는 수많은 소문이 되어 퍼져있었다. 근데 그 용병이 사실 스파이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적진의 향락촌에 투입됐다고. 그리고 그게,

“저였어요.”

눈앞의 이 쪼끄만한 이필릭스라고.



개같은 세상인 건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개같을 거라곤 생각 안했다. 이민호는 이제 정말로 결심했다. 널 빼내야겠다. 빼내서, 센티넬이고 전쟁이고 개같은 거 다 집어치우고 어디 작은 섬에 처박혀서 그냥 이필릭스로 살게 해야겠다고. 제 인생도 썩 좋지 않으면서 남 인생이 그 꼴인 게 그렇게 화가 났다.

“요즘 어딜 그리 다니시나.”

새벽 네시 반.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들어간 방에는 한지성이 귀신처럼 앉아있었다. 저도 몰래 소리를 지를 뻔한 이민호는, 제 혀를 씹는 것으로 비명을 대신했다. 아오, 아파. 너 뭐하냐? 성질이 불쑥 나서 까슬하게 질문을 던지면 한지성이 그걸 되받아쳤다. 넌 뭐하고 다니냐. 이민호는 꿀먹은 벙어리시늉을 했다.

“용 만나러 가냐?”

아, 눈치 빠른 한지성. 난 네가 좋다가도 참 멀리하고 싶더라. 이민호는 한지성의 맞은 편에 앉았다. 그래. 어차피 탈출시키기로 마음 먹은 이상 언젠간 언질할 일이었잖아.

스파이였다했다. 갑자기 그런 일로 적진 한복판에 떨어진 건 괜찮았다 그랬다. 향락촌에서 그런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도 괜찮았다 그랬다. 일곱살에 가족과 생이별 한것도, 7년간 죽어라 훈련만 받은 것도, 첫 임무가 암살이었던 것도 최전방에서 전투를 치른 것도 다 괜찮았다 그랬다. 근데, 그런데 저랑 떨어지는 게 싫었다고 했다. 스파이로서의 임무를 완수하면 돌아가야 하니까. 그게 너무 싫어서 차일피일 미루고 도망다니다가 잡혀갔다고 그랬다. 왜 임무를 수행하지 않았지? 묻는 말에는 다 그만두고 싶다 답했다고 했다. 하지만 적군에 회유당했다는 의심을 사 재판에 넘겨졌고, 끝내 반역죄로 지하감옥에 갇혔다고 그랬다. 그러니까, 내탓인 거야? 내가. 나 때문에 그런 꼴을 겪은 거냐고.

이민호가 어느새 손까지 덜덜 떨고 있으면 한지성이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그게 왜 형 탓이야. 형은 아무 잘못도 없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꼴을 보고도,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그런 이필릭스를 알고도 죄책감이 들지 않을 방법을 이민호는 몰랐다. 형 잘못 아니야. 허튼 생각말고, 이제 걔한테 가지도 마. 형이 그럴 필요 없어. 형이 위험 감수하면서 그래야 할 이유 없어. 하지만 그건 너무 뭘 모르는 소리였다. 그럴 필요가 없어? 그럴 이유가 없어? 아니, 지성아. 난 이미 그 애를 내버려 둘 수 없어.

전혀 다른 두 생각이 같은 공간에 있었다.



=



이민호는 가쁜 숨을 몰아쉰다. 얼굴에 튄 피가 뜨끈하다. 목에 상처를 입은 동료가 쇳소리를 냈다. 피가 상처 사이로 뚜껑 열린채 엎어진 음료수처럼 줄줄 샜다. 얼굴만 아는 인사였다. 좋은 감정도, 나쁜 감정도 없는 그냥 그 정도의 사람. 그리고 방금 전까지 살아있었다. 그랬는데, -이젠 죽을 거야. 이상하게 손이 덜덜 떨렸다. 전장에서도 육탄전을 전문으로하는 이민호로서는 그렇게 생소한 일도 아니었다. 그동안 그가 쏘고 썰고 폭파시킨 적군이 열손가락 모두 접고 다시 펴는 걸 열번은 반복할 만큼 많았다. 그런데 왜. 손에 쥔 열쇠 꾸러미가 쩔그렁대는 소리를 냈다. 손에 넣었다. 기어이 손에 넣고 말았다. 이민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피가 점점 퍼져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저 피가 군화를 적시기 전에 이곳을 떠야한다. 이민호는 얼굴에 튄 피를 닦았다. 이제 더 돌이킬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불시착한 걸 후회하지 않아.

기억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때와는 다른 형태로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형 꼬라지가 왜 그래?”

들켰다. 역시 그냥 갔어야했나. 하지만 그러기엔 피가 너무 많이 묻어있었다. 이민호는 피 묻은 셔츠를 저리로 내던질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어, 훈련하다 다쳤어.”
“개소리하지마.”

역시 안먹히나. 이민호는 하하 웃었다. 피칠갑을 해서는 뭐 좋다고 웃어. 한지성은 인상을 팍 구겼다. 형 무슨 짓 하고 다니는데. 한바탕 잔소리를 쏟아부을 기세다. 이민호는 양 손을 들어보였다. 걱정 고마운데, 내가 지금 시간이 없거든. 다음에 들을게. 대충 대꾸하면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한지성이 그런 말을 한다.

“다음이 있긴 해?”
“…뭐?”

너무 핵심을 뚫는 질문이라 이민호는 답지 않게 잠깐 굳었다. 다음. 너무 당연하게 내뱉은 말이지만 한지성 말이 맞다. 다음. 제게는 없을 수도 있는, 다음.

“형이 언제부터 남 일을 그렇게 신경썼어.”

한지성은 쉬지 않고 다음 말을 내뱉는다.

“남이 뭘 하든 자기 하나 먹고 살기 벅찬 게 형이잖아. 남이야 죽든 살든 네 한 몸 건사하면 되는 게 형이잖아, 딱히 살려고 사는 건 아닌데 죽을 일도 없으니 사는 게 형이잖아! 굳이 죽을 일 만들지 않는 게 형 너잖아! 그럼 그냥 계속 그렇게 살아! 지하감옥에 갇혀서 오늘내일하는 센티넬한테 그저 가이드일 뿐인 형이 뭘 해줄 수 있는데! 뭘 할 수 있는데!”
“지성아.”
“형 지금 거기 간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어? 죽겠다는 거야. 죽으러 가는 거라고! 내가 너 죽으러 간다는데 가만히 있어 그럼?!”
“너 지금 뭔가 잊었는데, 우리 원래 사지에서 장기말로 구르는 놈들이야.”
“말 돌리지 마. 이거랑 그거랑 같아?! 전쟁터가 차라리 나아! 거기가면 형은 잘 안죽지만, 지금은 죽는 거 확정짓고 가는 거라고!”

이민호는 손에 든 열쇠를 꾹 쥐었다. 틀린 말이 하나 없었다. 쟤가 저렇게 실속있는 말만 할 수 있는 애가 아닌데, 지금은 꼭 다른 사람 같다. 그만큼 한지성이 보기에도

“절대 못 가. 형 거기 가려면 나 죽이고 가.”
“한지성.”
“못 가.”
“지성아.”
“…….”
“난 갈 거야.”
“형 진짜…!”

한지성의 표정이 처참하게 무너진다. 그래도 이민호는 단호한 눈을 했다. 미안하다. 네가 그렇게 걱정을 하는데 하나도 안미안해서.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대면에 비관만 쏟아낼 수는 없는 거였다. 이민호는 겨우 쥐어짜낸 위로를 건넨다.

“그리고.”

“난 안 죽어.”

새빨간 거짓말을.

재수없게. 생각해보면 정말 처음부터 재수 없었다. 입버릇처럼 하던 말도 마찬가지로 재수 없다. 가진 게 없으니 잃을 게 없고, 잃을 것이 없어 무서운 것도 없다고. 한지성은 입술을 깨문다. 하지만 형이, 옛날의 형이랑 같냐고. 지금의 형에게 정말 가진 게, 잃을 게 없냐고. 근데 그 등이 너무 무언가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서, 한지성은 차마 이민호를 붙잡지 못했다. 대신 잇새로 욕을 내뱉었다. 개새끼. 이게 끝이라고. 이게 마지막이라니, 너랑 호형호제는 끝이다 망할 놈아.

“죽지말라고.”

울음 섞여 다 뭉개진 발음으로 하는 말이 이민호한테 하기에는 너무 안어울리는 말이었다. 이민호는 그냥 씩 웃었다. 티비 나오던 어디의 연에인 뺨치게 잘난 얼굴이다.

“근데도 죽으면, 찬이 형이랑 김우진씨한테 대신 안부 좀 전해줘라.”
“뭐, 인마?”
“너도, 잘 살고.”
“…야 이 개자식아!”

처절한 비난을 들으면서 이민호는 뜀박질을 했다. 이제 정말, 더 지체할 시간이 없다.



기지를 뛰쳐나온 후부터는 막힐 게 없었다. 수십 번도 더 드나든 곳이다. 눈 감고도 달릴 수 있을만한 길을 아무 방해 없이 통과할 수 있는 것을 보면 아직 들키지 않은 모양이었다. 허술하네. 전쟁을 위한 병력이 모인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만큼이나. 순식간에 9구역에 도달했고, 산처럼 버티고 선 건물 앞에 섰다. 이민호는 그제야 숨을 골랐다. 문득 망설여졌다. 이거 잘하는 짓일까? 그래도 남은 선택지는 직진뿐이었다. 이민호는 건물 안으로 천천히 발을 들였다.

조심성이라곤 요만큼도 없는 걸음걸이에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소리가 벽을 타고 통통 튄다. 통통 튄다하니 괜히 한지성이 생각나고 한지성이 생각나니까 처참한 얼굴이 떠오르고.

-형이 언제부터 남 일을 그렇게 신경썼어.
“…….”

맞아. 어디 하나 틀린 거 없이 다 맞는 말이었다. 별로 이런 인생을 살고 싶었던 건 아닌데. 별안간 웃음이 나왔다. 이민호는 그랬다. 사는데 딱히 미련 없고 언제 죽어도 상관 없었다. 하지만 죽지 않는 방법을 안다면 일부러 죽을 생각도 없었다. 아는데 모르는 척 하는 걸 이민호는 못했다. 자의로 배웠든 타의로 배웠든 전투하는 방법을 알고 승리하는 전략을 안다면 일부러 지고 일부러 죽을 순 없는 것이다. 근데 이게 죽지 못해 사는 거랑 또 달랐다. You know what I mean? 언젠가 김우진에게 이 이야기를 했을 때, 김우진은 이민호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복잡하게 돌아버린 단순한 새끼. 딱 맞는 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필릭스.”

그렇다면 너는.

“데리러 왔어.”

이런 나를 의지하는 너는. 이런 나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너는.

가는 목끝의 동그란 머리통이 고개를 들었다. 까무룩 잠들어 있던 모양이지. 잠이 잔뜩 묻은 눈에 제 얼굴이 걸리자 환하게 웃는다. 민호 형. 듣기 좋은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불렀다. 이민호는 마주 웃으며 손 끝에 걸린 열쇠를 흔들어보였다. 안그래도 동그란 눈이 더 동그래져서는,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을 하는 이필릭스.

“약속했잖아.”

이필릭스는 철창 사이로 손을 뻗어 이민호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이내 말캉한 입술이 이민호의 입술에 닿았다. 처음 이 입술이 닿았을 땐 너무 버석해서 입술인지 낙엽인지 구분도 안갔는데. 새삼 열심히 먹인 보람이 있다. 배부르게는 아녀도, 어느 정도 인간 꼴로는 돌려놨다는데 의의를 두기로 한다. 그리고. 이정도 회복률을 보이는 데는 가이딩도 한 몫 했겠지. 이민호는 슬쩍 웃었다. 제법 말랑하게 차오른 볼이 동그란 모양으로 웃고 있어서. 어. 가이딩한 보람 만땅이다. 하지만 그게 정말 단순한 가이딩이었을까. 너는 단순히 가이딩 몇 번 해준 센티넬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 이민호가 이민호에게 물었다.

“필릭스.”
“네?”
“…일단 거기서 나오자.”

아니. 이렇게까지 안 해. 그래도 이민호는 이민호를 외면한다. 마주보면. 지금 마주봐서 뭘 어떡하자고. 끝까지 함께 할 수도 없는데. 더 책임질 수도 없는데. 그런데 지금에 와서 그걸 마주하기는, …무서웠다. 저야 원래 복잡하게 돌아버린 단순한 놈이라 일을 이렇게 벌여놓고도 대수롭잖게 구는 게 더 쉽지만, 쟤는 그게 아니잖아.

철장의 문이 열리고 족쇄가 풀렸다. 이필릭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한참이나 제 발목과 이민호를 번갈아 봤다. 그리곤 걸음마를 처음 떼는 아이처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반년 만에 바로 선 몸이 종잇장처럼 휘청였다. 이민호는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이필릭스의 허리를 잡아챘다. 다른 손으론 마른 손목을 붙들었다. 마른 허리가, 손목이 한 팔 한 손에 너끈하게 감겼다. 이민호는 쯧쯧 혀를 찼다. 안되겠다. 너 나가면 뭐가 됐든 좀 많이씩 먹어. 무조건 많이 먹고, 살 좀 찌워라. 이민호가 잔소리를 쏟아부으면 이필릭스는 그저 깔깔 웃었다. 형. 우리 지금 꼭 그때 같아요. 우리 거기서 잠깐 만났을 때. 그 때 춤췄었는데. 이민호는 거기서 눈물이 날뻔했다. 가장 기억에 깊게 박힌 파편. 그걸 저 입으로 말하는데 어떻게 울컥하지 않을 수 있지.

“…어. 왈츠.”
“한 번 더 출래요?”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게 무슨 춤이야.”
“괜찮아요. 형이 잡아주고 있잖아요.”

대놓고 저한테 체중을 싣겠단 소리였다. 이민호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그게 춤추는 거야? 내 움직임 따라 휘청이는 거지. 순순히 예쁜 소리 한 번 안해도 이필릭스는 낯간지러운 소리만 해댔다.

“형 움직임이면 나는 그냥 휩쓸려도 좋아요.”

아. 너는 정말. 이민호는 이필릭스의 손에 깍지를 끼고 천천히 움직였다. 음악 한자락 없이도 부드러운 동작. 짜맞춘 것처럼 잘 맞는 움직임. 이필릭스는 춤을 추는 내내 까르르 웃는데 이민호는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몸도 너무 가깝고, 마음도 너무 가깝고, 모든 게 너무 가까웠다. 이렇게 많은 게 가까운데.

“형.”
“어.”
“저 이제 걸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끝을 내야했다. 이민호는 허리에 감았던 손을 풀었다.



계단은 오르는 동안은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 이민호는 한 칸 앞에, 이필릭스는 한 칸 뒤에 서서 걷기만 했다. 두 손을 말 대신 섞고서 걷기만 했다. 드나들 때마다 쓸데없이 긴 계단을 욕하기 급급했는데, 지금에 와선 감사해서 눈물이 다 났다. 인간이란 존재가 이렇게 웃기다. 너무 웃긴 나머지 상상 속의 자신과 원맨쇼도 다 하고. 이민호가 끈질기게 묻고 있었다. 너는 단순히 가이딩 몇 번 해준 센티넬한테 이렇게까지 해? 다시 말하지만, 아니. 이렇게까지 안 해. 하지만 이민호는 이민호를 외면한다. 마주보면. 지금 마주봐서 뭘 어떡하라고. 끝까지 함께 할 수 없는데. 더 책임질 수가 없는데. 지금에 와서 그걸 마주하기는, …무섭잖아. 저야 원래 복잡하게 돌아버린 단순한 놈이라 일을 이렇게 벌여놓고도 죽으면 죽는 거지 대수롭잖게 구는 게 더 쉽지만, 얘는 그게 아니니까.

이민호는 별안간 이필릭스의 손을 꽉 쥐었다. 형? 내내 아무 말 없이 걷던 이필릭스가 이민호를 불렀다. 이민호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혀로 입술을 축이고, 겨우 입을 열었다. 지하에서 벗어나면….

“지하에서 벗어나면 6층으로 가. 6층 가면 금고 하나 있거든. 되게 작은데, 금고 열고 금고벽 밀면 그 뒤에 공간 있더라. 너 작으니까 좀 오래 숨어있어도 크게 불편하진 않을 거야. 여기서 나오자 마자 또 그런 구석에 들어가라니 미안한데 어쩔 수가 없다. 금고벽 꽤 두꺼워서 두드려보는 걸로 그 뒤에 공간 있다는 건 몰라. 다만 그만큼 열기가 좀 힘들긴 한데, 어쩌겠어. 살려면 열어야지. 여기 관리하던 게 우리쪽이 아니라 거기에 그런 게 있는지 아무도 모를 거야. 사실 지금까진 네 존재도 모를 걸. 왜 우수병사씩 되는 내가 그런 미친 짓을 하고 뛰쳐나왔는지 모를 거야. 그러길 바라고. 건물 밖에서 포획하는 게 쉬우니까 굳이 이 안에 들어오진 않을 것 같거든. 숨을 시간은 충분하니까 너무 조바심 내지는 말고. 또,”
“…그럼 형은요.”

이필릭스의 목소리에 소금기가 묻어있는 건 제가 착각하는 걸까? 이민호는 걸음을 멈췄다. 저야 원래 그런 놈이었다.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복잡하게 돌아버린 단순한 인간. 내가 이렇게 이상한데, 너도 그만큼 이상하지. 근데. 그런데. 그래도 너는. 조금만 돌고 복잡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그런 거 말고. 가능하면 살려고 발버둥 쳤으면 좋겠어.

“나야 뭐, 별 일 있겠니. 내가 세운 공이 몇 갠데.”
“…….”

짐짓 가볍게 던진 말에도 심각한 표정은 풀어지지 않는다. 아, 너무 대놓고 거짓말인가. 얘가 뭘 알아도 저보다 더 알텐데.

“저 안 갈래요.”
“가. 어차피 난 뭘해도 벌 받아.”
“형.”
“스파이였지만 동료도 하나, …죽였고. 스파이 죽여놓고도 너 빼돌리려는 짓 하고 있잖아.”
“그래도 저 안데리고 나가면 살 수 있어요. 저 다시 지하에 가둬 놓고, 수상한 사람 발견했다고 말하면 살 수 있어요.”
“그래. 살겠지. 그리고 너랑 나란히 지하감옥에 갇힐 거야. 물론 여기 말고 다른 곳에. 네 생각엔 그게 더 낫겠어?”
“…….”
“이제 더 돌이킬 수 없어.”

이게 더 나은 방법이야. 날 믿어. 이민호는 그딴 말을 믿으라며 잘생긴 얼굴로 웃었다.



“이민호 상병. 자네 무슨 짓을 벌이고 있지?”

건물 밖을 나서면 소대장의 목소리가 저를 맞았다. 이민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햇살이 눈부셨다. 날씨 한 번 더럽게 좋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다. 가을이던가. 생소했다. 매번 도둑쥐마냥 새벽에 오가느라 밝은 하늘 아래서 이곳에 서게 될 줄은 몰랐다. 소대장이 답을 재촉했다. 이민호 상병.

“음. 제가 뭘하고 있냐면요.”
“…….”
“당신네들 개짓거리 더 보기 싫어서 반역 좀 해볼라고.”
“말을 조심히 하는 게 좋을 텐데.”

총구가 모조리 저를 향했다. 이민호는 낄낄 웃었다. 와. 지금 센티넬도 아닌 일개 가이드 하나 잡겠다고 이 병력을 동원한 건가. 뭐, 나쁘진 않았다. 우수병사 대접을 이렇게까지 해주니 몸둘바를 모르겠달까.

“죽어, 개자식아.”

그런 말을 하곤 사납게 노려보는 표정이 과연 악명 높던 수룡다웠다. 이민호는 풍선 터지듯 웃었다. 와하하. 너무 우스워 눈물까지 다 났다.




“너 진짜 후회 안 해?”
“형이 안하면 나도 안해요.”

아, 진짜 예뻐죽겠네. 너는 이런 상황에서까지 예뻐서 어쩌니. 끌어안고 뽀뽀나 퍼부었으면 좋겠는데, 그걸 못하게 되는 건 조금 후회할 것 같다.

“정말 마지막 기회다. 그간의 공을 봐서 제안하는 거야. 네 옆의 센티넬을 넘기고 용서를 구해라.”

이필릭스가 이민호의 손을 꼭 잡았다. 후회 안해요, 저는. 단호한 목소리. 이민호는 문득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떡하지. 내가 못나서, 나는 조금 후회할 것도 같아. 너랑 해보고 싶은 게 밤하늘의 별만큼 많았다. 근데 그걸 못하게 될 게 억울해서, 그래서 후회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아, 거 뭐냐. 좆이나 까쇼.”

실실 웃으며 싸구려 말을 내뱉는 이민호의 옆에서 짤막한 중지 손가락을 치켜 올리는 이필릭스. 진짜 얘도 정상은 아니네. 근데 그게 그렇게 사랑스러웠다. 이민호는 결국 이필릭스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부볐다. 소대장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전원 조준.”

불시착한 전투기를 본 적이 있다. 채 탈출하지 못하고 적진으로 떨어져버린 전투기 조종사. 간첩 딱지가 붙어 고된 길만이 남은 그를 수용소까지 직접 후송했었다. 왜 낙하산으로 탈출하지 않았지? 고도가 낮은 것도 아니었는데.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궁금증을 던지면 전투기 조종사는 바람 빠지는 웃음을 웃었다. 글쎄. 왜일까. 그는 썩 암울하지 않은 목소리로 운을 뗐다. 그럴 때가 있는 거야. 이 길을 선택하면 어떻게 될지 결과가 빤히 보이는데도 그럴 수밖에 없을 때. 이봐, 친구. 전투기에는 나 혼자만 있던 게 아니야. 다른 친구가 하나 더 있었지. 낙하산은 하나 뿐이었고, 나는 그 친구를 탈출시켰어. 왜 그랬을까? 역으로 날아든 질문에는 딱히 답하지 못했다. 왜지? 그가 더 중요한 인사라서? 그가 탈출하는 게 더 수월해서? 수용소에 도착할 때까지도 마땅한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하고 수용소에 전투기 조종사를 넘기는 순간. 그는 이런 말을 했다.

-그래도 나는 불시착한 걸 후회하지 않아.

무슨 뜻인지 도통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 말은, 이제 온전히 이민호의 것이 되어있었다.

이민호는 입술을 맞댄채로 물었다. 정말, 후회 안 해?
이필릭스가 입술을 맞댄채로 답했다. 정말, 후회 안 해.

“사격!”

두 사람을 향한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마침내,

우리는 서로에게 불시착하기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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