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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사랑은 소나기가 내리던 날 끝났다

W. Julia

  잘생겼다. 그를 보면 절로 나오는 감탄사 비스무리한 말이었다. 나 아닌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일 터였다. 그는 외모는 물론 인품과 지성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다고 봐도 무방할 사람이었다. 그의 대부분의 모습은 다정했고, 때로는 필요에 따라 냉철해지기도 했다. 어쨌든 사람들은 그를 사랑했다. 잘생기고, 착하고, 똑똑하기까지 한 그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가끔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나 뒤에서 험담을 지껄일 뿐이었다. 원래 예쁜 꽃에는 나비고 벌이고 엉키는 법이었다. 종종 그에 대한 가십과 악의적인 루머에도 그의 이미지는 나빠질 기세조차 없었다. 그는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호의를 베풀며 항상 웃는 사람. 모두를 좋아하고 모두가 좋아하는. 만인의 짝사랑 상대인 이민호.

 

그리고 나는, 그를 짝사랑한다.

 

*

 

  그 선배를, 아니, 그냥 ‘그’라고 부르겠다. 그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나가던 12월 중반의 겨울이었다. 축제 전날 저녁 무렵, 온갖 동아리에서 부스를 설치하고 판넬을 설치한다며 강당은 학생들로 북적였다. 패션디자인동아리에서는 런웨이 리허설을 한다며 조명담당과 다소 격한 대화를 나누던 참이었다. 댄스부였던 나는 최종 리허설을 앞두고 볼 것도 없는 우리 팀 부스 의자에 앉아 경찰 동아리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고 있었다.

 

‘야, 너 진짜 한서고 축제 안 갈 거냐?’

 

‘나 오늘 리허설이야... 째면 죽어...’

 

‘너희 선배들도 별로 안 무섭잖아. 딱 하루만, 응? 같이 가주면 안 될까? 다른 애들은 다 동아리에 붙잡혀서 못 가거나 늦게 간대 ㅠㅠ 나 이미 준비 다 했단 말이야...’

 

‘일단 분위기 좀 보고...’

 

  부장 선배를 곁눈질로 훑어보니 이제 최종 리허설이니까 힘 제대로 주고 추라느니, 올해 학교에서 하는 마지막 공연이니 조금만 더 힘내자느니 하며 수정할 점과 동선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어설픈 이유로는 빠지기 힘들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댄스부는 6기를 끝으로 더 이상 부장을 이을 1학년 지원자가 없었다. 나 또한 정시파이기는 했으나 평일 저녁 학원을 빠지고, 주말에도 연습을 가느라 부모님이 탐탁치 않아 하셨으므로 2학년 때까지 춤춘답시고 연습실을 들락날락거리면 미운털이 제대로 박힐 것이 뻔했다. 하지만 지금 친구를 내버려뒀다가는 한동안 징징거리며 들러붙어오는 것을 감당해야 할 것이었다. 그건 내가 죽기보다도 더 당하기 싫은 짓이었다. 그래서 나는 복잡한 틈을 타 부스 책상 아래 엎어진 책가방을 조심스레 주워들고 급히 강당을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같은 댄스부 친구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

 

‘연호야, 나 방금 할머니한테서 연락이 와서... 부장 형한테 말 좀 잘 해줄 수 있어? 몸이 좀 안 좋으신 것 같아서... ㅠㅠ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아. 진짜 미안해...’

 

  양심에 찔리기는 했지만 석식 먹기 전 할머니께서 전화를 하신 것도 사실이고, 늘 몸이 안 좋으시다는 말을 달고 사시는데다, 축제를 위해 지금 가봐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으므로 따지고 보면 내가 거짓말한 것은 없었다. 조금은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교문을 나서며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나 지금 버스 타려고... 나 혼자라도 가야지...

 

 -나 갈 수 있어! 리허설 빠졌어!

 

 -....? 나 지금 버스 탔는데, 교문 앞에서 기다릴까?

 

 -... 그래, 먼저 가 있어. 나도 빨리 다음 버스 타고 갈게.

 

  한서고 하면 얼굴, 얼굴 하면 한서고일 정도로 예쁘고 잘생긴 학생들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한서고에서 직진하다보면 나오는 아파트에 사는 나로서는 그 말에 동감했다. 중학생 시절 학원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이면 야자하기 전인지 아파트 앞 편의점은 한서고 학생들로 북적였고, 소문대로 잘생긴 형들이 많았다. 오죽하면 한서고는 학생을 얼굴로 뽑냐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솔직히 연애를 해본 적은 없지만 썸 아닌 썸도 타봤고, 성별 상관없이 설레본 적도 있었다. 그렇기에 한서고 축제로 향하는 발걸음에는 평소보다도 설렘이 가득 서려 있었다.

 

  다들 한서고 축제에 가는지 버스 안은 설렘으로 들떠 평소에는 하지도 않는 화장을 하고 고데기로 머리를 세팅한 여학생들로 가득했다. 익숙한 얼굴도 보이는 게, 쟤네도 동아리 부장한테 뻥치고 쨌으리라 짐작했다. 다들 다음 날 아침 학교에 도착하면 후폭풍에 잔뜩 소심해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아 이번 정류장은 한서고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간신히 내린 곳은 한서고 정문이었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보니 먼저 가 있겠다던 친구가 서 있었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강당을 가리키는 안내판을 보며 강당으로 향했다. 어둑한 강당 안은 이미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돌아다니는 본교 학생과 화전여고 교복을 입은 학생 몇몇이 눈에 띄었다. 조심스레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굴러다니는 팜플렛 하나를 집어들어 순서를 확인했다. 첫 번째 순서 태권도 시범은 놓쳤고, 두 번째 순서인 사물놀이가 한창이었다. 꽹과리 소리에 고막이 얼얼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런 걸 하면서 놀았구나 생각하니 내가 조선인이었다면 아마 남들 다 하는 놀이에 혼자 어울리지도 즐기지도 못하고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더니 어느덧 검도 시범도 끝나고 화전여고 찬조공연 순서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같이 왔던 친구는 이미 공연을 더 가까이에서 보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한서고 학생들 틈에 섞여 사라져버린 뒤였다. 친구마저 없으니 혼자 앉아 있기에도 뻘쭘해져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땅히 있을 만한 곳도 없어 아무데나 가방을 내려두고 최대한 벽에 붙어 가만히 서 있었다. 몸에 달라붙는 상의와 입은 건지 만 건지 다리가 시리지도 않은지 속바지보다 짧아보이는 바지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마냥 좋다고 열광하는 남학생들이 조금은 한심해보였다. 아니, 많이 한심해보였다. 여기가 동물원인가, 다들 제 본능에 못 이기게. 비슷한 가사의 노래가 생각 날 것도 같았다. 10분이 채 안되는 찬조공연이 끝나고 남학생들은 이내 흥미를 잃은 듯했다. 보컬부의 공연은 메인보컬의 삑사리로 분위기 싸해지게 만들었고, 힙합부의 랩은 스피커 주변 사람들의 고막만 강타했다. 한마디로 중구난방이었다. 주변에 서 있던 여학생들은 이걸 볼 바에는 차라리 죽겠다며 지루해 죽겠다는 티를 내면서도 나가지는 않았다. 아마 중반의 댄스부와 후반의 패션부, 보디빌딩부 때문일 것이었다. 한서고 댄스부 부장의 조건이 아미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한서고의 댄스부는 방탄소년단의 곡을 커버하기로 유명했다. 올해도 다르지 않았다. 방탄소년단의 IDOL, Fake Love를 완곡하고 엔시티 유의 BOSS 1절과 댄스 브레이크, 엑소의 Tempo 1절로 끝이 났다. 나도 잘 추는 편은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서... 별로였다.

 

 -얘네가 왜 유명하냐?

 

 -존나 이해 안 된다.

 

 -우리 학교 댄스부가 더 잘 추는 것 같은데.

 

그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나보다. 그럼에도 여학생들은 꿋꿋이 아픈 다리를 눌러가며 발뒤꿈치를 들고 무대 쪽으로 고개를 뻗으며 나갈 생각은 없어보였다. 문득 같이 온 친구가 생각났다. 화전여고 찬조공연이 끝나고도 보이지 않았다. 시끄러운 강당 속에서 전화를 걸었더니 들리지 않는 듯했다. 서너 번을 다시 걸고 나서야 친구는 전화를 받았다.

 

 -너 어디야?

 

 -나 좀 뒤에! 거기 왼쪽에 사람들 몰려 있는 곳 제일 뒤에 있어!

 

 -어디라고?

 

 -뒤에! 너 서 있는 곳 뒤쪽에!

 

  뒤를 돌아보니 아직 나오지 않은 패션부가 대기하고 있었다. 다들 180은 넘어보이는 모델 덕에 평균보다 ‘약간’ 키가 작은 내가 친구를 찾기에는 무리였다. 까치발을 들고 친구와 전화를 하면서 내가 보이냐고 손을 휘젓고 있는데,

 

 -나 너 보여! 나 그쪽... 야! 안 들려? 갑자기 왜 말이 없어?

  뒤에 서 있던 모델들 사이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이용복! 안 들려? 야! 정신 차려! 왜 갑자기 멍 때려? 나 너 보인다니까! 여기로 오라고!

 

 -나... 나, 어떡하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나... 사랑에 빠진 것 같아...

 

  황당해하는 친구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어떤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멈춘 듯 보였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얼굴은 불이 난 듯 화끈거렸다. 손에 힘이 풀리고 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은 서서히 내려갔다.

 

  나는,

 

  사랑에 빠졌다.

 

  한참이나 넋을 놓고 한 곳만 바라보는 나를 의아하게 여긴 친구가 모델들을 헤집고 내 앞에 섰다. 내 눈 앞에서 손바닥을 흔들어보이며 정신 차리라고 말했지만 제정신이 아닌 내게 들릴 리 없었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사람? 조각?

 

 -사랑에 빠졌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누구?

 

 -저기... 모델... 코트 안에 흰 와이셔츠랑 검은 넥타이... 염색한 사람...

 

 -어디? 어? 와... 아이돌인가....? 저 선배 맞지? 진짜 잘생겼다, 아이돌인 줄.

 

  자칭 타칭 눈이 높기로 유명한 친구마저 아이돌인 줄 알았다며 감탄했다. 조각같은 얼굴에 연신 감탄하며 시선은 그를 좇고 있는데 곧 패션부 차례인지 그가 대기실쪽으로 향했다. 내 앞을 지나쳐갈 때 본 그의 옆모습은 정말이지 신이 빚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완벽해보였다. 잘생겼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될 만한 잘생김이었다. 그 뒤로 패션부가 나오기 전까지 나는 계속 그의 얘기를 했다. 친구는 네가 남자도 좋아하는 줄 몰랐다며 당황스러워했다. 정확히는 내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 자체에 놀라워했다. 그러면서 나중에 그의 전화번호라도 따보라며 부추겼다. 그의 전화번호를 얻는다면, 그와 연락을 주고받는다면, 그와... 연애를 하게 된다면. 한 평생 연애에는 관심도 감흥도 없던 열일곱의 끝자락.

 

  첫사랑이 시작되었다.

 

*

 

  패션부가 언제쯤 나오려나, 한참을 서 있느라 다리가 아릿하고 갈증이 심해질 무렵 사회자의 멘트가 들렸다.

 

 -이번 순서가 뭔지 아시나요, 석현 씨?

 

 -음, 잘 모르겠는데요?

 

 -정말 그것도 모르세요? 한서고 축제의 자랑이자 하이라이트! 패션부 차례잖아요!

 

 -아, 정말요? 올해는 더 막강한 비주얼과 완벽한 피지컬로 돌아왔다고 하는데요, 여러분의 함성이 필요할 것 같아요~ 모두 3초간 전방에 함성 발사!

 

  뻔한 멘트와 함께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중학생 때 미술 시간에 본 패션쇼 영상에서 나왔던 것 같은 음악이 깔리며 모델들이 두 명씩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열광하는 여학생들 사이에 파묻혀 재빠르게 그가 있는지 스캔 후 그가 보이지 않으면 맥이 빠졌다. 내가 잘못 봤나? 패션부 맞을 텐데... 어림잡아 모델이 열 명은 넘게 나온 것 같은데 그가 보이지 않아 실망하고 고개를 숙이던 찰나, 함성이 커지고 무대 근처로 몰려드는 학생들 덕에 이리저리 밀쳐지다 돌출 무대 앞까지 떠밀려왔다. 왜 이렇게 난리인가 생각하며 고개를 들자, 그가 서 있었다.

 

  긴 베이지 코트를 입고, 오묘한 색으로 물든 머리를 한 그는 마치... 뭐랄까,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왼쪽 베이지 코트남 누구냐는 아우성이 시끄럽게 메아리쳤다. 역시 잘생긴 사람은 모두에게 잘생겼구나 싶었다. 인기도 많을 테고, 애인도 있으려나... 새삼 그의 인기를 실감하자니 의기소침해졌다. 나같은 게 번호를 달라고 한다고 줄까? 애인이 있으면 어쩌지? 애인이 없어도 짝사랑 상대가 있다면?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해야 하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토록 기다렸던 그의 런웨이는 순식간에 끝나 있었다. 마지막 순서로 보디빌딩부가 와이셔츠에 청바지만 입은 채 걸어나와 와이셔츠를 찢어댔다. 패션부의 런웨이 때보다도 큰 소리에 살짝 귀를 틀어막고 뒤쪽으로 빠졌다. 그새 사라진 친구를 찾아 두리번대다 언제 나온 건지 아까 그 베이지색 코드를 입고 서 있는 그를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려 친구를 찾는 척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마주친 시선이 싫지만은 않았다.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척, 다시 뒤로 돌아 그를 슬쩍 쳐다보았다. 착각이었을까, 우연이었을까. 그에게로 눈을 돌리자마자 곧바로 시선이 맞닿았다. 도무지 1초 이상 마주치기 부끄러운 얼굴이었다. 목에 손가락을 가져다대니 맥박이 미친 듯이 뛰었다. 긴장할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를 훔쳐보는 사이 모든 순서가 끝나 있었다. 아직 나가지 말아달라는 사회자의 간청이 들렸다. 그가 웃으며 친구들과 나가고 있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여기서 놓치면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급하게 나가는 사람들 사이 합류해 강당을 빠져나왔다. 여러 가방과 어깨에 부딪혀 튕겨나듯 누군가에게 부딪혔다.

 

 -아, 죄송...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와 부딪혔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쉴새없이 밀어주는 사람들 덕에 그와 어깨를 밀착한 채로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나오고 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있었고, 나는 혼자였다. 친구가 어디 있는지조차 몰랐다. 무작정 그를 뒤따라 걸었다. 교문 앞에서 망설이자 여학생 하나가 그에게 달려가 말을 걸었다. 몇 마디 주고 받더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고, 여학생이 그에게 팔짱을 꼈다. 여자 친구인가? 일행으로 추정되는 다른 여학생이 그와 여학생의 모습을 핸드폰에 담았다. 그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저 사진 한 장 같이 찍어달라는 부탁이었던 것 같았다. 그의 일행이 저 멀리 갔는지 당황한 듯 방황하는 그를 보자마자 정말 이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장한 탓에 굳어진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저기, 있잖아요...

 

 -네?

 

 -그... 그러니까, 그...

 

 -네.

 

  애인 있으세요? 전화번호 주실 수 있으세요? 뭐라고 묻지?

 

 -이, 이름이 뭐예요....?

 

 -저... 이민호요. 이, 민, 호.

 

이게 아닌데. 애꿎은 이름만 물었다. 다시, 제대로 물어야 한다.

 

 -아 혹시...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하세요?

 

 -네, 해요.

 

  이때쯤 나도 정신을 놓은 것 같다. 기껏 얼굴에 열 내면서 한다는 말이 SNS 하냐니.

 

 -그러면... 친구 신청 걸거나... 팔로우 해도 돼요?

 

 -네, 해도 돼요.

 

  답답할 법도 한데 웃으며 상냥하게 답해주는 그는 사실 천사가 아닐까 싶었다. 아니, 천사가 맞을 것이다.

 

 -진짜 진짜 죄송한데 혹시... 애인 있으세요?

 

 -네? 없어요.

 

  애인이 없으면 썸은? 좋아하는 사람은? 묻고 싶은 게 수십 가지였지만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한 방을 노려야 했다.

 

 -전화번호, 주실 수 있으세요?

 

 -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발음이 부정확했거나 목소리가 너무 작았던 것 같다. 잘 들리지 않았는지 살짝 허리를 숙이고 자세를 낮춰줄수록 그의 얼굴과 가까워졌다. 정면으로 마주치기에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빠르게 뛰는 심장이 증명했다. 롱패딩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잠금을 해제하고 그에게 내밀었다.

 

 -번호... 주시면, 안 될까요?

 

  번호 주실 수 있으세요도, 번호 주세요도 아닌 번호 주시면 안 될까요라니. 내가 봐도 좀 바보 같았다. 그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으며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이름... 이민호 맞죠...

 

 -네, 맞아요.

 

 -진짜... 진짜... 감사합니다...

 

  거의 울었던 것 같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인사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집에 다다라서야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친놈아, 너 어디야?

 

 -나... 나, 번호 땄어...

 

 -무슨 번호?

 

 -그, 패션부 선배... 번호 땄다고...

 

 -뭐? 진짜? 어떻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눈물을 질질 흘리며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그래서 그에게 연락은 해봤냐는 질문이 되돌아왔다. 잊고 있었다며 고맙다는 인사 후 단칼에 전화를 끊었다. 뭐라고 보내야 할까. 문자를 썼다 지웠다 하는 데만 십여 분이 걸렸다.

 

‘안녕하세요, 아까 번호 따간 영선고 교복 입은 앤데요. 혹시 번호 주기 싫으신데 억지로 주신 건 아니시죠. ㅠㅠ’

 

  너무 딱딱하거나 부담스럽지 않은 문구를 고안하느라 모든 힘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전화번호를 찍어주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 다시 온몸에 열이 올랐다. 나 진짜, 그 선배 좋아하는 걸까. 이게 사랑이 맞나? 연애를 해본 적 없고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으니 이게 연애 감정인지 단순히 그의 얼굴에 설레는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서 올 답장을 기다리니 일 초가 일 분 같고 일 분이 한 시간 같았다. 샤워라도 하고 나면 답장이 와있겠거니 하고 체념한 채 샤워를 했다. 20분 가량이 지났음에도 답장이 없자 설마 일부러 없는 번호나 남의 번호를 찍어준 건 아닐지 걱정스러웠다. 역시 번호 딸 때 너무 바보같이 굴었나? 급격히 부끄러움이 밀려와 베개에 얼굴을 묻고 발을 동동거렸다. 때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아니에요 ㅋㅋㅋㅋㅋ 부끄러워서’

 

  차갑게 생긴 외모와 달리 귀여운 말투에 순간 심장을 부여잡았다. 뭐지? 다른 사람인가? 예상한 말투와는 너무 다른 말투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다행이다. 오늘 인기 되게 많으시길래... 귀찮아하실 줄 알았어요.’

 

‘아니에요 진짜, 저 인기 안 많아요.’

 

‘오늘 제 주변 여학생들 다들 소리 지르고 난리 났던데... 번호 많이 따이고 그러지 않아요?’

 

‘태어나서 오늘 그쪽한테 처음 따여봤어요 ㅎㅎ’

 

말도 안 돼. 그렇게 인기 많은 사람이 처음이라고?

 

  실제로는 베개에 머리를 박고 침대 헤드를 쳐가면서 애써 침착한 척 문자를 이어갔다. 그는 3학년으로 이미 수능도 끝났고 곧 성인이 될 졸업반이었다. 문자를 잘 보지 않는 편이고, 이상형은 딱히 없다고 했다. 문자를 몇 번 주고받지도 않았는데 이미 한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자러 간다는 그의 말에 잘 자라며 이모티콘까지 덧붙여 답장을 보냈다. 자러 간 그와는 달리 자꾸만 쿵쿵대는 심장에 나는 새벽 네 시까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도저히 잠에 들 수 없는 밤이었다.

 

*

 

  그 날 이후로도 며칠이나 그와의 연락을 지속했다. 12월 중반 만난 열아홉의 그는 어느덧 스무 살의 성인이 되었고, 나는 열여덟이 되었지만 그와 나 사이의 진전은 없었다. 그의 말대로 그는 정말 문자를 잘 보지 않는 건지 답장의 텀은 세네 시간이 기본이었고, 어떨 때는 반나절을 기다려 짤막한 한 마디의 답장을 받기도 했다. 일방적으로 내가 그에게 매달리는 것 같았고, 그가 대화를 이어가려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야 첫사랑을 겪는 내가 그 상황에서 대처할 방법을 알 리 만무했다. 그저 오늘은 조금 더 빨리 내 문자를 읽고 답장을 보내주길 바랄 뿐이었다.

 

  유난히 단 게 당기는 날이었다. 귀찮음을 이겨내고 주말 오전부터 일어나 아파트 앞의 편의점으로 향했다. 늘 마시던 바나나우유를 사기 위함이었다. 입구가 좁은 흰 빨대를 뚜껑에 꽂고 연노란색 우유를 들이키며 다시 집으로 향했다. 옆 동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익숙한 베이지 코트가 보였다.

 

  그였다.

 

  그는 똑같은 베이지 코트를 입은 아담한 키의 단발머리 여자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 친구일까? 그냥 친구끼리 맞춰 입은 걸 수도 있지. 가족일 수도 있고. 애써 내 자신을 위로하던 참이었다. 그런 내 헛된 희망을 짓밟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는 그의 앞에 서 있는 여자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 순간, 나와 그의 시선이 또 다시 맞닿았다. 그와 처음 눈이 마주쳤던 순간처럼 눈을 피했다. 거의 발목까지 오는 검은 롱패딩과 시야를 절반은 가리는 검은 볼캡과 바나나우유를 마시느라 턱에 걸친 검은 마스크 덕에 나를 알아보지는 못 한 듯했다. 그냥 지나가던 사람인 척, 아무렇지 않게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때마침 비가 내렸다. 가랑비일 듯 가볍게 내리던 빗방울은 순식간에 소나기가 되어 거세게 떨어졌다. 그를 처음 봤던 순간처럼 손에 힘이 풀렸다.

 

  뒤집힌 빨대를 따라 바나나우유가 흘렀다.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볼캡이 자꾸만 흘러내려 눈 앞을 가리고, 눈물이 눈 앞을 가렸다.

 

  하늘이 흐리고, 시야가 흐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비에 젖은 모자와 패딩을 벗어던지고 침대에 누웠다. 더욱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에 묻히길 바라며 큰 소리로 울었다. 그가 눈물이기라도 한 것마냥 다 떠내려 가버리라고 한참을 울어댔다. 그가 정말 눈물이기라도 했는지 한참을 울어도 눈물은 자꾸만 흘렀다. 눈물이 나오지도 않을 만큼 울고 난 후에 바라본 창문 밖 하늘은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너무나도 화창했다. 그는 순식간에 몰아치고 빠르게 끝나버리는 소나기 같았다.

 

이제야 뭔지 알 것 같았던 열일곱의 첫사랑이 열여덟의 시작과 동시에 소나기를 따라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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