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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김삿갓

*TRIGGER WARNING: 가정폭력, 자살기도

 

이민호와 이필릭스는 알코올중독자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둘은 호주에 살고 있었고 사는 곳은 매주 모임이 열리는 장소를 사이에 두고 정반대였다. 이민호는 공허함을 앓고 있었고 그 공허를 채우기(잊기) 위해 술을 마셨다. 이필릭스는 알코올중독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의 밑에서 매일매일을 맞으며 살아왔고, 자살을 꿈꿨다.

 

 

 

"자, 오늘은 우리 모임에 새로운 분이 오셨죠?"

 

"안녕하세요, 필릭스 리입니다..."

 

 

 

민호는 아직도 필릭스와의 첫 만남을 기억한다. 쭈뼛쭈뼛 들어와 민호의 맞은편에 앉았던 필릭스. 그날도 민호는 제 일주일을 말하는 차례에 패스를 요청했고 필릭스는 이 모임에 온 첫날인 주제에 제 이야기를 더듬더듬 이어나갔다.

 

 

 

대충 요약하자면 이랬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후 늘어난 빚과 상실감을 이기지 못해 마시기 시작한 술이 늘어 다정했던 아버지가 한순간에 사라지셨다고. 어머니는 그걸 이기지 못해 집을 나가셨고 필릭스는 아직 혼자 살 능력이 되지 않아 아직도 그 집에서 아버지께 맞으며 산다는, 그런 흔한 소설 류의 이야기였다.

 

 

 

그게 현실에서 일어났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민호와 필릭스가 만난 그 모임은 둘을 제외하고 모두가 서구 쪽 인종이어서 필릭스는 저도 모르게 민호에게 시선을 두었다. 아무리 호주에서 나고 자란 호주 국적자라 해도 동양적인 외모에 차별을 당한 탓인지 저와 비슷한 겉모습을 가지고 있는 민호를 계속해서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리를 꼬고 무릎에 깍지 낀 손을 걸친 채 발끝만 보고 있던 민호가 불현듯 고개를 들어 필릭스를 보았다. 필릭스는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고양이를 닮은 듯 묘하게 호랑이 같은 그 남자의 시선에 갇힌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둘은 개인적으로 대화를 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이 이상으로 관심을 보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슬아슬한 시선의 줄타기만을 이어갔을 뿐이었다.

 

 

 

 

 

그렇게 삼 주가 지났다. 필릭스가 이 모임에 온 지도 근 한 달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두 시간짜리 모임인데 필릭스가 삼십 분을 늦었다. 얇은 터틀넥을 입고 왔지만 그 위로 퍼런 멍 자국이 삐져나왔다. 모임의 모든 사람들은 필릭스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민호만이 무표정으로 필릭스의 목 부근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인상이 인상이니만큼 냉해 보이는 표정에 필릭스는 조금 움츠러들었다.

 

 

 

민호는 매주 시간 맞춰 들어오던 필릭스가 늦자 의아했다. 처음 들어온 이후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필릭스가 늦는다는 사실에 불현듯 떠오른 필릭스의 과거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목 부근에 미처 가리지 못한 상처가 보였다. 사실 민호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지만, 주제넘을 게 뻔하지만. 모임이 끝난 이후 처음으로 필릭스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늦으셨네요.

 

 

 

"네, 네? 아... 네 일이 좀 있어서요..."

 

 

 

민호는 잔뜩 얼어 말하는 필릭스를 무감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탓하려는 건 아니었고요. 그냥 걱정돼서요."

 

"네... 감사합니다, 민... 민호 씨?"

 

"네, 이민호요. 같은 이 씨던데 한국인이세요?"

 

"아니요. 호주 사람이에요. 한국계는 맞대요."

 

"그러시구나. 그럼 한국어는 하나도 못 하시는 거예요?"

 

"알아듣긴 하는데 말은 못 해요."

 

"그래요? 아쉽다. 여기 온 이후로 한국어로 말할 일이 없어서 좀 심심했는데."

 

"저 근데 한국어 배우고 싶었어요."

 

"배우실래요? 저한테요."

 

"그래도 돼요?

 

"안될 건 없죠."

 

"그럼 부탁드려요."

 

 

 

민호는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린다고 생각했다. 둘은 처음으로 말을 트자마자 번호도 교환했다. 필릭스와 Minho Lee. 민호는 깔끔히 한글로 필릭스라 저장했고 필릭스는 한참을 고민하다 Lee를 추가했다.

 

 

 

 

 

둘의 사적인 첫 만남은 그 이후로도 일주일 이상이나 걸렸다. 민호는 필릭스가 먼저 연락하길 기다렸다가, 필릭스는 민호에게 연락하기 눈치 보여서 다음 모임까지 질질 끌었던 것이다. 필릭스가 쭈뼛대며 모임이 끝난 후 민호에게 다가갔다.

 

 

 

"저... 민호 씨."

 

"네."

 

"그 한국어 배우는 거... 시간 언제가 괜찮으세요?"

 

"아. 전 아무 때나 괜찮아요."

 

"어 그럼..."

 

"필릭스 씨가 편한 시간 정해주실래요?"

 

 

 

필릭스는 한참을 고민하다 화요일을 골랐다. 평일이니 밖에 나간다고 아버지께 의심받지 않을 것 같기도 했고 주말에 괜히 불러내는 것보다 평일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 화요일에 이 앞 카페에서 뵐까요?"

 

"네... 좋아요."

 

"잘 들어가요, 필릭스. 화요일에 봐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민호 씨."

 

 

 

 

 

필릭스는 고민에 빠졌다. 아직 멍이 가시지 않고 옅게 남아있어 폴라티를 입어야 했는데 그래도 꾸며 입고 싶었다. 고민에 고민을 더한 끝에 사놓고 한 번도 입지 않은 새 폴라티와 코트, 청바지를 입었다. 필릭스는 늦어도 여섯 시까지는 들어와야 했다. 지금 시각은 열두 시 반, 민호가 점심을 먹지 않았다면 먼저 먹고 시작해야 할 터였다. 약속 장소인 카페에 도착한 필릭스는 두리번거리다 구석 테이블에 앉아있는 민호를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총총 다가가 조심스레 앞에 앉은 필릭스는 민호와 눈이 마주치자 환히 웃어 보였다.

 

 

 

"어. 왔어요?"

 

"네. 점심은요?"

 

"대충 때웠어요. 그쪽은요?"

 

"아직이요..."

 

"점심 뭐 어디 식당에 가야 할까요? 여기서 빵 같은 걸로 먹어도 괜찮다면 그렇게 하고요."

 

"그냥 여기서 먹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주문하고 올게요, 뭐 드실래요?"

 

"같이 가요."

 

 

 

카운터에 도착한 민호는 필릭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는... 스트로베리 스무디랑 치즈 케이크로 주세요."

 

"저는 아메리카노요. 아이스로 주세요. 계산은 카드로 할게요."

 

 

 

필릭스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려는 순간 민호가 먼저 카드를 냈다. 당황에 물든 눈을 한 필릭스가 민호의 옷자락을 잡았다. 큰 눈을 깜빡이며 한참을 바라보던 필릭스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감사합니다, 한 마디 하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카드를 받아들고 필릭스를 이끌어 다시 자리에 앉은 민호가 필릭스를 향해 입을 뗐다.

 

 

 

"고맙긴요. 사주고 싶어서 사주는 거예요. 너무 부담 갖지 말고 그냥 먹어요, 괜찮으니까."

 

"그래도........."

 

"고마우면,"

 

"..."

 

"말 편하게 해요"

 

"네...?"

 

"그때 들어보니까 저보다 어리던데요. 나랑 말할 때마다 그렇게 잔뜩 얼어서는 영어에 높임말 없는데도 높임말이 느껴질 정도예요."

 

"아...... 죄송해요."

 

"그러라고 한 말은 아닌데."

 

 

 

필릭스는 고개를 폭 숙였다.

 

 

 

"그러니까 그냥 말할 때 그렇게 안 얼어있어도 된다고요. 편하게 해요 편하게. 동네 형 대하는 느낌으로."

 

"노력... 해볼게요."

 

"나 그렇게 무서운 사람 아니에요."

 

 

 

민호는 하나도 착해 보이지 않는 인상으로 옅게 웃었다. 이런 조건 없는 친절은 쉬이 믿지 말라 했건만 왠지 이 사람에게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필릭스가 아무 사람이나 덥석덥석 믿을 만큼 절박했던 것도 아니고 앞뒤 재지 않고 애정을 갈구할 정도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이 사람에게만'이었다.

 

 

 

주문한 음료와 케이크가 나오고 필릭스는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오물오물 천천히 씹어 넘기는 모습을 보던 민호가 웃음기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글 읽는 것도 원해요? 아니면 말만?"

 

"음... 전 말만 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어디 정도까지 알고 있어요?"

 

"안녕, 안녕하세요? 만 알고 있어요. 아 그거랑 죄송해요."

 

"좋아요, 그럼 시작할까요?"

 

 

 

둘에게 매주 화요일은 또 다른 모임이 되었다.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내지도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화요일 오후 열두 시 반이 되면 필릭스는 카페에 갔고 민호는 그보다 이십 분쯤 일찍 도착해 필릭스를 기다렸다. 그렇게 또 이 주일이 지났다. 매주 모임에서 민호는 이제 일주일 간 있었던 일을 요약해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됐고, 필릭스가 털어놓는 일주일에는 걱정할 만한 것들이 점차 줄어갔다. 그 사이에 필릭스는 민호를 한층 편하게 대할 수 있게 되었고 눈도 마주칠 수 있게 되었다. 민호는 필릭스에 대한 호감이 늘었고 필릭스 또한 가끔 두근거림을 느꼈다. 민호는 필릭스에게 필요 이상으로 다정했고 필릭스는 그것을 느꼈으면서도 거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원했다. 일평생 살면서 누군가에게 애정을 갈구해본 적이 없는데 민호는 그런 저를 자꾸 애정에 목마르게 만들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남들과 별다를 것 없는 관계였다. 단지 그 사람들보다는 더 자주 만난다는 차이점뿐이었는데 어째서 이토록 스며든 것인지. 뚜렷한 의미도 이유도 없는 다정은 언젠가 독이 되어 돌아온다는 누군가의 말을 아직도 기억하는 필릭스는 시작도 하지 못한 감정을 잘라내야만 했다.

 

 

 

그렇지만 필릭스는 한 번만 눈 감기로 했다. 사람의 온정이 그리웠기도 했거니와 이런 사람을 놓치면 언제 다시 다정을 받을 수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조건 없는 다정이 독이라면 천천히 중독되어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만 맡겨보기로 했다.

 

 

 

반면에 민호는 호기심이었다. 눈도 못 마주치던 애가 어느 순간부터 눈을 똑바로 마주하더니 이젠 제법 자신이 붙은 채로 절 대하던 모습. 하지만 민호 또한 집안에서 버려지듯 호주로 온 지 꽤 오랜 시간이 되어 은연중에 사람을 그렸을 것이다. 평소의 저라면 생각도 하지 못했을 다정을 내보이며 순진하고 순수하고 상처 많은 아이가 제게 계속 붙어있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민호는 귀찮은 걸 즐기지 않았다. 그저 제게 오면 오는 거고 가면 가는 거였지만 이상하게 이 아이에게만은 그 규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필릭스."

 

"네?"

 

"목요일에 시간 돼?"

 

"목요일이요? 어... 아마도요."

 

"영화 보러 갈래?"

 

"저 돈 없는데..."

 

"몸만 와도 돼."

 

 

 

깜빡, 깜빡. 필릭스의 눈이 몇 번 감았다 뜨였다.

 

 

 

"좋아요. 몇 시예요?"

 

"점심 먹고 만날래 아니면 먹기 전에 만날래?"

 

"먹기 전에 만나요."

 

 

 

민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목요일 열한 시에 여기 앞에서 보자. 민호의 눈에 다정이 깃들었다.

 

 

 

 

 

필릭스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기분이 꽤 좋았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눈을 번득이며 이쪽을 보는 아버지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너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녀, 어?"

 

"아, 아빠..."

 

"어디 갔다 왔어."

 

"잘못... 잘못했어요..."

 

"네가 이런다고 이 집에서 나갈 수는 있을 것 같아?"

 

 

 

필릭스는 바닥에 던져져 속수무책으로 맞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와 키도 비슷하고 덩치도 그리 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아닌데. 웅크려 제 팔로 머리를 감쌌다. 그랬더니 목을 움켜쥐어 벽에 밀쳤다. 숨을 쉬지 못해 컥컥대며 발버둥 치는 필릭스를 아버지는 무감한 눈으로 내려다보다 그대로 손의 힘을 풀었다. 생리적으로 고인 눈물로 흐려진 시야를 애써 다잡으며 필사적으로 기었다.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폰 하나만을 가지고 방에 있던 아버지의 눈을 피해 겨우 집 밖으로 나왔다. 매번 구타를 당했을 때마다 올라오던 마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옥상으로 이번에도 올라갔다. 평소에는 그저 마음을 다잡기 위해 올라오던 옥상이었지만...

 

 

 

난간 근처까지 간 필릭스는 다시금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는 휴대폰 화면을 켰다. 바쁘게 움직이는 손가락.

 

 

 

[민호]

 

[저 좀 꽉 잡아주세요]

 

 

 

그러고는 다시금 천천히 난간으로 다가갔다. 안정된 호흡으로 난간에 기대섰다. 밤이라 아래가 까마득했다. 필릭스는 불현듯 두려움이 엄습했다. 저 끝없는 어둠이 저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몸이 딱딱하게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려가고 싶었다. 일전에 이 장소를 흘리듯 말한 적이 있으니 민호가 빨리 찾아와줬으면 했다.

 

 

 

같은 시간 민호는 필릭스의 문자를 보자마자 밖으로 나왔다. 필릭스가 자기는 이러고 살아도 절대 제가 제 목숨을 버리는 일은 없을 거라 장담했는데. 민호는 불현듯 드는 생각에 걸음을 멈췄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자주 가는 곳이 있다 했었다.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빨리 뛰어가면 십 분쯤 걸릴 곳이었다. 앞뒤 잴 것 없이 뛰기 시작했다. 저 멀리 건물 옥상에서 한 인영이 보였다. 건물에 들어가 무작정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옥상 문을 세게 열어젖히고 숨을 골랐다. 천천히 필릭스에게 다가가 두 걸음 앞에 섰다.

 

 

 

"필릭스."

 

"..."

 

"나 왔어."

 

 

 

한 걸음 다가갔다.

 

 

 

"내려가자."

 

 

 

한 걸음 더 다가갔다.

 

 

 

"필릭스."

 

 

 

필릭스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 몸을 돌려 마주 보고 섰다. 민호의 눈이 필릭스를 어르고 있었다.

 

 

 

"무서워요."

 

"응, 알아."

 

"나 너무 무서워"

 

"괜찮아. 나 있잖아."

 

"민호..."

 

"응, 필릭스."

 

"..."

 

"우리 영화도 보러 가야지."

 

"갈 수 있을까요...?"

 

"갈 수 있어."

 

"..."

 

"집 가자 필릭스."

 

 

 

가서, 나랑 살자.

 

 

 

 

 

정작 자기도 조난을 당한 주제에 서로의 구조 신호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안식처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불시착하기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이만하면 괜찮지 않냐고 민호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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