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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꿈

W. speed

꽃은 사쿠라요, 인간이면 사무라이라.

 

에도막부를 개화시켰던 무사도의 명언이 유언으로 저무는 때가 왔다. 1889년 메이지 유신, 마지막 쇼군 요시노부가 모든 정권을 천황에게 위임한 봄이었다. 명예롭게 할복을 선택한 이들은 꽃비처럼 스러져갔다. 마을에 도는 것이 변화인지 역병인지 어쩌면 변화가 역병처럼 도는 건 아닌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격동의 물살은 사람과 시대가 뒤섞인 모든 것을 휩쓸어갔다. 백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진 것이라곤 돈과 아들이 전부였던 그가 휩쓸린 곳은 동경東京, 신문화의 온상지였다.

 

동경은 가는 길만 꼬박 보름이 걸렸다. 만월이 조각달로 기울었고 아들은 실신을 반복했다. 지독한 행군이었다. 하지만 백작은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반드시 동경에 뿌리내려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태어나길 심장에 병을 앓은, 그래서 자주 가슴을 움키며 찡그렸고, 그마저도 누군가는 돌아보게 만들던, 유일한 피붙이.

 

아들.

 

조선 땅에서 업어 온 데다 씨마저 달라 어디 내보일 수 없었음에도 백작은 그에게 정성이었다. 스무 해를 못 넘깁니다. 복채도 받지 않던 무녀에게 보여주고 싶었고 오던 길 돌아가던 의원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아직 잘 삽디다. 그것이 동경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동경이면 들어줄 꿈이라 믿었다.

 

이제 올해로 열아홉. 사람들은 백작의 병든 아들을 후쿠福라고 불렀다.

 

 

 

 

 

창백한 꿈

 

스피드

 

 

 

 

 

사월이 저문들 동경은 아직 봄이었다. 신사에선 미풍이 불어왔고 밤에는 연등을 매단 목련들이 거리를 밝혔다. 백작은 거리의 끝에서도 한참을 더 가야 하는 변두리에 터를 잡았다. 빈 절을 증축해 만든 저택이었다. 때문인지 저택의 곳곳에선 향냄새가 났다. 백작은 그 사실을 좋아하지 않았다. 말그대로 초상이 날까봐 예민해졌다는 게 시종들의 얘기다. 부러 정원을 울창하게 메워 향내를 잡을 정도로 그랬다.

 

정원의 한가운데엔 큰 벚나무가 있었는데 절을 짓기도 전부터 살았던 고목이라 들었다. 후쿠의 방은 고목과 맞닿은 데로 정해졌다. 볕이 들어 따뜻했고 바람도 잘 통했다.

 

벚닢이 방 안으로 밀려드는 때엔 남풍이 부는 날이었다. 흩날리는 봄 속에서 후쿠는 마른 가슴을 부여잡았다. 정착을 하기까지 고생한 탓이 컸다. 파리한 낯으로 서지도 앉지도 못하는 아들을 보며 백작은 움직였다. 동경 시내를 바닥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처음은 약방이었다. 가만 얘길 듣던 약의는 고개부터 저었다. 다음도, 그 다음도, 그렇게 돌아다닌 곳이 금세 열 손을 넘어갔다. 졸도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었다. 겨우 숨구멍이 트인 건 나흘째였다. 늙으면 젊은이병 모르오. 백발의 노의가 무심하게 귀띔했다. 양의한테 가. ....... 칼로 찢어서라도 고쳐 줄 걸세. 받아든 종이엔 성씨 하나가 쓰여 있었다. 리이李.

 

사실 백작에겐 양의에 대한 기억이 존재하긴 했다. 몸에 흉을 내는 자들이니 멀리하라던 괴담 같은 가르침. 백작을 업어 키운 조모의 생각이었다.

 

물론 죽고 없는 조모가 죽어가는 아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한달음에 찾아간 가문은 그 기세가 대단했는데 선대부터 쇼군들의 수술을 집도했고 살려낸 인물만 수십에 이른다고.

 

불신은 곧 맹신으로 바뀌었다. 도박판이라도 벌린듯 웃돈에 웃돈을 끼얹었다. 억소리 나는 판이었다. 눈물 겨운 부정인지 돈의 위력인지 결국 닷새째 되던 날, 백작은 가문의 큰 손과 접촉을 이뤄냈다. 구순의 나이에도 눈빛이 서늘한 노인이었다. 사연을 듣던 노인은 한 가지만 물었다.

 

피를 토한 적이 있나?

 

백작이 고갤 저었다. 노인이 가만히 웃었다.

 

열흘 후에 막내 손자가 돌아오네.

 

바다 건너 배워 온 놈이지.

 

……

 

그 때 다시 봅세.

 

 

 

-

 

 

 

종일 내리던 봄비는 초저녁이 되어서야 그쳤다. 습도가 포근했고 바람에선 젖은 흙냄새가 났다. 다만 그날따라 저택이 어수선하기를 시종들의 발소리까지 여간 소란한 게 아니었다. 오만상이 된 후쿠를 보모 미츠요가 타일렀다. 연회가 있다고 하네요. 후쿠는 무관심한 눈길로 저무는 해를 응시했다. 유난히 어두운 방이었다.

 

주변이 짙게 가라앉을 즈음 사륜마차 한 대가 저택에 당도했다. 곧 차례대로 내린 이들에게선 지식인의 풍미가 느껴졌다. 가문의 주요 인사였고 백작에겐 더없이 중요한 저녁이었다.

 

백작은 친히 내려가 일행들을 맞이했다. 인원이 확인되자 공손하게 수그리더니 이내 앞장을 섰다. 그 뒤를 지식인들과 시종들이 따랐다. 긴 행렬이 화강석을 깎아 만든 돌길을 걸었다. 돌길의 사잇새엔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전등이 말간 빛을 발하고 있었다. 동경 어드메엔 아직도 전깃불은 커녕 초도 못 피우는 곳이 있다던데, 저택은 현관으로 이어지는 모든 길이 빠짐없이 밝았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순간 여기저기서 체면을 잊은 탄성이 들렸다. 실로 어마어마한 내부였다. 몇몇 이들은 목을 빼고 두리번거리기까지 했다. 동경 변두리에 이정도의 규모가 존재하리라곤 짐작도 해본 적이 없었다. 겉보기엔 일본식 건축법을 따랐지만 실내는 양식에 가까운 곳이었다. 응접실과 다다미방이 기묘한 조화를 이뤘다. 노년의 지식인들은 내심 눈 둘 곳을 몰랐다. 대리석 바닥과 샹들리에를 처음 보는 탓이었다.

 

앞장서던 백작이 멈춘 곳은 복도의 끝이었다. 천해의 진미와 술이 열맞춰 늘어섰고 게이샤들은 음악을 연주했다. 적막했던 저택에 간만의 활기가 도는 순간이었다.

 

 

 

"도련님."

 

미츠요가 방문을 두드렸을 때 후쿠는 머리 끝까지 이불을 덮어쓴 채로 누워있었다. 연희의 소음을 등지고서 미동조차 없었다. 이거 좀 드셔보세요. 다가온 미츠요가 머리맡에 쟁반을 두었다. 잘 다듬은 제철과일이었다.

 

미츠요의 말에도 후쿠는 대답 한 번을 않았다. 그 이유를 미츠요는 잘 알고 있었다. 주인님이 아무리 아낀들 나설 수 있는 신분이 아닌 도련님. 조선에서 건너와 병든 가슴으로 외로움을 먹고 자란 우리 도련님. 미츠요는 그것이 늘 안쓰러웠다. 한날은 도련님이 하소연 하기를 차라리 쭉 아팠으면 싶다고, 가끔 호전이라도 될 때면 누워있는 게 고문이고 침대가 지옥이라고. 심지어 그 날이 딱 오늘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부아가 치미는 판에 저만 빼고 즐겁다 하니 견딜 수 있는 우울감이 아닌 것이다.

 

살그머니 이불을 들춘 미츠요가 얼굴을 보듬었다. 후쿠가 도리질을 치자 이번엔 꼭지를 벤 딸기를 입에 물려주었다. 드셔요. ....... 드셔야 낫고 나아야 밤새 놀아요. 사람 손을 타서인지 바깥 출입을 안 해서인지, 도련님은 또래보다 유난히 앳되었는데 오늘은 말그대로 애처럼 보였다.

 

미츠요의 성화에 후쿠가 못 이긴척 몸을 일으켰다. 침대맡에 걸터앉아 딸기를 씹으며 어깨를 두드려댔다. 살이 없어 텅텅 소리가 났다. 미츠요는 하던 대로 커튼을 젖히고 창을 열었다. 환기를 시키고 옷을 갈아입힐 시간이었다. 개켜둔 유카타 중 몇 개를 걷어오자 후쿠가 하나를 골랐다. 백색이었다.

 

느릿하게 일어선 후쿠가 팔을 벌렸다. 미츠요는 야무진 손길로 깃을 다듬고 앞자락을 포갰다. 허리가 가는 탓에 오비는 최대한 힘주어 감았다. 순간 미츠요의 등너머로 후쿠가 목을 뺐다. 정원에서 인기척이 일었다. 분명 사람이었다. 자꾸 창쪽으로 가려는 후쿠를 미츠요가 붙들었다. 왜 그러세요. 얼굴을 가까이 댄 후쿠가 목소릴 죽였다. 누가 있어. 놀란 미츠요가 화들짝 돌아섰다. 이번엔 미츠요를 제친 후쿠가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벚나무 아래 음영이 움직이더니 정원등에 확실히 얼굴이 비쳤다. 남자였다. 입에 무언가를 물고 있었다. 심지어 연기가 일고 있었다. 불? 불이야? 급기야 말릴 새도 없이 후쿠가 달려나갔다. 미츠요가 잡아채기도 전이었다.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며 후쿠는 할 말을 떠올렸다. 남의 집에서 뭐하는 거예요? 면전에 대고 쏘아줄 상상을 하니 발꿈치에 힘이 들어갔다. 어쩌면 화풀이를 하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고요한 저녁. 그런데 남자의 얼굴를 맞닥들이자 왜인지 묘한 직감이 들었다. 그 분이 낫게 해주실 거야. 아빠에게 들었던 사람인 것만 같았다.

 

그에게선 생전 맡아본 적 없는 냄새가 났다. 매캐하고 나른했다. 담배였다. 그러나 후쿠는 담배가 무엇인지 몰랐다. 집안에 병자가 있으니 백작부터 시종들까지 누구 하나 태우는 사람이 없었다. 열아홉 평생을 담배의 존재를 모르고 산 탓에 불장난으로 오해를 했다.

 

대충 연기를 날린 남자가 후쿠를 응시했다. 이상했다. 백작에겐 아들이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 아들이라기엔 낯이 영 고왔다. 그런데 고운 낯에서 뜻밖의 말이 나오길,

 

리노상.

 

이름을 알고 있었다. 누구지? 리노는 저도 모르게 안경을 고쳐 썼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서늘한 바람이 볼을 스치고 벚닢이 옷자락을 맴돌았다. 순간 서 있던 후쿠의 허리가 갑자기 고꾸라졌다. 이내 가슴팍을 쥐며 헐떡이는 것이 보통 병이 아님을 직감했다. 엎어진 후쿠를 리노가 일으켰다. 후쿠는 리노의 오비를 쥔 채 숨만 몰아쉬었다. 꼭 졸도할 것만 같았다.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후쿠의 팔을 제 목에 두른 리노가 등을 빌려주었다. 업힌 몸이 지나치게 가벼웠다. 옷을 그러잡는 손이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결국 침대로 돌아온 것은 한밤이 지난 후였다. 통증이 심했던지 온 머리칼이 땀에 눌러 붙은 채였다. 다행히 연회는 큰 차질 없이 끝났다. 어쩌면 기회일지도 몰랐다. 백작은 방을 나서는 리노를 잠시 불렀다.

 

처음엔 완강한 거절이 돌아왔다. 왕진은 안 합니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몇 번을 그랬다. 보다 못한 리노의 조부가 직접 나섰다. 마음을 넓게 써라. 동정심에도 호소했다. 보통 가여운 애가 아니야. ……. 리노는 어두운 방문 너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불현듯 옷깃을 움켜쥐던 손길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리노는 고갤 처박고 후회했다. 애시당초 연회 같은 데에 오는 게 아니었다. 골치 아픈 일에 엮인 것 같았다. 제 앞가림도 힘든 마당에 누굴 치료한다는 건 지, 주제 넘는 짓을 했다. 그렇다고 무를 수도 없었다. 이미 승낙을 해버린 후였다.

 

리노상.

 

왜인지 저를 부르던 목소리가 자꾸만 떠올랐다. 중성적인 용모에 비해 나즈막했다. 머리가 아팠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제야 과음을 한 걸 알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모든 게 취한 탓이었다.

 

 

 

-

 

 

 

중심가에 있던 리노의 집에서 백작의 저택까지는 한 시간 남짓 걸렸다. 일주일에 두 번. 백작은 언제나 사람을 보내 리노를 데려오고 데려다주었다. 아들을 아끼는 만큼 극진한 대우였다.

 

리노가 방문할 때면 후쿠는 매번 침대 맡에 앉아있었다. 풀 먹인 옷을 입고서 꼿꼿이 몸을 편 채였다.

 

진찰의 시작은 항상 청진기였다. 서역에서 온 그것은 심장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했다. 가슴에 닿는 서늘함, 서로에게 맞춰가는 호흡. 이 순간이 올 때면 후쿠는 숨을 자연스럽게 쉬는 법을 잊어버렸다. 모든 세포가 심장으로 달려드는 기분이었고 혹시나 심박이 크게 뛸 까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런 후쿠에게 리노는 가끔 농을 걸었다. 적당한 선에서 긴장을 풀어줄 요량이었다. 사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마냥 무탈하진 않았다. 첫 진찰 때엔 작은 소란도 있었다.

 

 

 

"도련님!"

 

방 너머로 갑작스런 아우성이 들렸다. 놀란 미츠요가 후쿠를 부르며 뛰어 들어왔다. 펼쳐진 광경은 기가 막혔다. 침대 발치로 온갖 물품들이 내동댕이 쳐진 건 둘째 치고 후쿠가 발개진 눈으로 씩씩대고 있었다. 유카타를 젖혔다는 게 이유였다.

 

후쿠는 맨 몸을 보이길 극도로 싫어했다. 온갖 민간요법을 저지른 탓에 왼쪽 흉곽이 엉망이었는데 흡사 화상이라도 입은 듯 해괴한 몰골이었다.

 

예민한 손길로 앞을 여미는 후쿠에게 리노가 다가왔다. 나뒹구는 의약품을 발로 밀어내며 앉더니 안경을 고쳐 썼다. 뭐 아픈건 니 손해니까. 순간 매무새를 정리하던 후쿠가 멈칫했다.

 

“그냥 니가 정해.”

 

리노는 아랑곳 않았다.

 

“벗을래 계속 아플래.”

 

상냥한 목소리에 반해 낯빛이 단호했다. 마주 보는 눈이 한 번을 깜빡이지 않았다. 걱정이 된 미츠요가 다가오자 리노가 공손하게 문을 가리켰다. 나가달란 뜻이었다.

 

둘만 남은 방 안은 정적으로 가득했다. 누구 하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돌팔이죠."

 

먼저 입을 뗀 건 후쿠였다.

 

"사기꾼이죠."

 

그도 그럴것이 여태 치료랍시고 받았던 일들이 시쳇말로 돈지랄이었다. 통증은 더해가는데 흉만 얻었으니눈에 불신이 둥둥 떠다녔다. 가만히 지켜보던 리노가 실소를 터뜨렸다.

 

그래서, 돌팔이면? 사기꾼이면?

 

익히 얘긴 들었다지만 생각보다 후쿠는 훨씬 예민했다. 착한 것과는 별개였다. 리노가 앞머릴 가볍게 쓸며 자릴 잡았다.

 

근데 돌팔이가 낫게 해주면? 그땐 어떡할래?

 

…….

 

결혼이라도 하나?

 

듣고 있던 후쿠의 미간이 순식간에 우겨졌다. 돌팔이에 사기꾼인 것도 모자라 헛소릴 하는 탕아였다. 최악이었다.

 

질색하는 반응에 리노가 실실 웃었다. 무섭지. 이번엔 왕진 가방을 잡아채더니 굴러다니는 약통 더미를 쓸어넣었다. 그러니까 가만 있어주면 좋겠다. ....... 나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거든. 부탁인지 협박인지 헷갈렸다. 목소리가 다정해 더 그랬다. 후쿠는 묘하게 기가 꺾이는 기분이었다. 곁눈질로 리노를 훑기만 했다. 리노의 눈은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이 안경알에 쓸렸다. 그만치 속눈썹이 길었다.

 

결국 다시 옷깃을 젖힌 건 후쿠였다. 분이 덜 가신듯 목이며 귓가가 여전히 벌갰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아비되는 사람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몸이었다. 허락이라곤 미츠요가 유일했고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그런 후쿠의 시간을 이해하는 건지 리노의 표정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흉한 흔적에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이후 서로가 서로에게 적응한 건 횟수로 네 번째부터였다. 후쿠는 더 이상 옷 벗기에 열을 내지 않았고 리노는 옷깃을 여며주는데 머뭇거리지 않았다.

 

처방은 대부분 주사로 이루어졌다. 뜨거운 헝겊으로 소독한 바늘이 손목을 침범할 때면 후쿠는 고갤 돌리며 눈을 감았다.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빨리 눈을 떴다. 주삿바늘이 빠져나가는 순간에 상처를 문질러주는 손길이 나쁘지 않았다.

 

의외로 리노는 후쿠의 기분에 대해서 자주 물었다. 갑자기 통증이 올 땐 어떤지, 또 괜찮을 땐 어떤지. 사실 괜찮은 날이란 없었다. 언제 발작이 올지 모르니 분과 초가 불안의 연속이었다. 그 감정의 기복이 리노에겐 병의 증세만큼 중요했다. 아프면 우울하고 우울하면 더 아픈 법이었다. 매번 후쿠의 상태를 기록하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기록물을 다음 진찰 때와 비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엊그제 자다 깨서 울었다고?"

 

후쿠가 대답 대신 고갤 끄덕였다.

 

"왜?"

 

"……."

 

이번엔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던 리노가 어깨를 으쓱했다. 말하기 싫으면 말고. 무심한 건지 배려인 건지 애매했다. 리노는 가루약 더미를 협탁 위로 올렸다. 앞으로는 이것도 먹어. ……. 자다 깰 일 없을거야. 손목을 들자 시계가 네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간다. 왕진 가방을 챙긴 리노가 가볍게 턱짓했다. 불현듯 나가려는 등뒤로 목소리가 매달렸다.

 

"억울해서요."

 

돌아보는 리노를 후쿠가 빳빳하게 응시했다.

 

"나만 아픈게 싫어서요."

 

말을 마친 후쿠는 대단한 기밀이라도 폭로한 듯 숨을 몰아쉬었다. 귓전에서 맥박이 둥둥 울렸다. 리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처음 보는 후쿠의 표정이 낯설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한참을 쳐다보았다. 후쿠는 평생 햇빛 아래 거닌 적이 없음에도 얼굴에 주근깨가 있었다. 머리칼도 반짝였다. 멀리 이국의 무인도에서 온 사람처럼 그랬다. 신기한 사람이었다. 피부에서 아열대의 냄새가 나는 도련님. 모래를 밟고 달렸을 것만 같은 얼굴로 침대에서만 살았다니. 어쩌면 태양빛에 상사병이 들어 귀신이 주근깨라도 준 건지 싶었다.

 

"나으면 되지."

 

돌아온 리노가 침대맡에 걸터 앉았다.

 

"나아서 마츠리도 가고 성인식도 하면 되지."

 

어딘지 상냥한 목소리로 새끼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그러니까 말 좀 잘 들어라. 물끄러미 있는 후쿠에게 리노가 응?하고 채근했다. 떠밀리듯 후쿠가 손가락을 걸었다. 너도 어지간히 손 작다. ……. 나만하네. 안경 너머로 리노가 웃었다. 약속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청진기, 주사, 약 그리고 기분을 물어오는 사람. 아마 그즈음이었을 것이다. 직접 유카타를 고르기 시작한 게, 손을 꼽아가며 기다린 게, 정원의 벚잎이 바람에 사그라든 게.

 

때는 유월, 녹음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

 

 

 

동경의 여름은 무더웠다. 습도가 높았고 한낮엔 열사병이 유행했다. 아이와 어른이 번갈아 쓰러지길 아흐레, 결국 왕진 시간도 바꿔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길어진 해를 따라 오전에서 저녁으로 옮겼다. 다만 진찰이 끝나면 한밤이 되어 귀가가 곤란했다.

 

결국 리노는 저녁에 와서 다음 날 아침에 돌아갔다. 백작의 권유였다. 일주일에 이틀은 저택에서 자는 셈이었다. 침실은 후쿠의 옆방으로 정했다. 남는 방이야 많았지만 혹시나 잠든 사이 발작이 올 것을 염려한 선택이었다.

 

주사를 맞은 후쿠는 두어 시간을 내리 잤다. 약에 취해 몸부림은커녕 꿈도 꾸지 않았다. 리노는 침대맡 의자에 앉아 책을 읽었다. 책이면 공짜로 준대도 사양이었지만 가만있자니 좀이 쑤셨고 자릴 비우자니 불안했다.

 

후쿠는 보통 해가 저물어 전등을 킬 즈음 눈을 떴다. 저녁을 먹기 전 새 옷으로 갈아입는 시간이기도 했다. 돌아있던 리노가 바로 앉으면 후쿠는 처음 보는 차림새가 되어 있었다. 매번 다른 유카타였다. 쪽빛이 어울리는 구나. 언젠가 후쿠를 보며 리노는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옷가지를 정리한 미츠요가 후쿠를 머리맡에 앉혔다. 차린 상은 무척 단출했다.

 

소금물로 입을 헹군 후쿠가 젓가락을 들었다. 책에 있던 리노의 시선이 자연스레 옮겨갔다. 습관인지 후쿠는 음식을 먹을 때엔 꼭 입을 가리고 먹었다. 그러면서 밥알은 세듯이 반찬은 고르듯이 집었는데 그마저도 금방 손을 뗐다. 안 하니만 못한 식사였다. 보다 못한 리노가 결국 한 마디 했다.

 

"야 그렇게 먹어서 언제 나을래?"

 

"……."

 

특히 이거. 리노가 가리킨 것은 구로마메黒豆, 검은콩이었다. 왜 안 먹냐? 그 소리에 후쿠의 눈썹이 쳐졌다.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모르는 구나. 이게 여기 되게 좋거든? 리노가 가리킨 곳은 가슴팍이었다. 후쿠가 잇몸을 잘근거렸다. 리노가 눈썹을 까닥했다. 먹으라니까? ……. 얼른.

 

결국 밥이며 찬이며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처음 있는일이었다. 쟁반을 가지러 온 미츠요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후쿠는 어깨만 으쓱했다. 오늘은 약을 먹어도 속이 아프지 않았다.

 

 

 

불현듯 눈을 떴을 땐 혼자 누운 채였다. 사방이 고요했다. 후쿠는 멍한 눈을 비볐다. 얘기를 하던 중 저도 모르게 잠이 든 것 같았다. 열린 창으로 달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목이 말랐다. 물을 머금은 후쿠가 창틀에 기댔다. 별이 많은 새벽이었다. 문득 아래를 보니 벚나무 근처에 누군가 있었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인기척을 내려다 그냥 말았다. 턱을 괸 채 가만히 보기만 했다.

 

리노는 뭔가를 물고 있었다. 손에 든 것은 성냥이었다. 이내 발화한 불꽃이 입으로 옮겨가더니 불씨가 되었고 접점에서 묘한 연기가 일었다. 후쿠는 숨을 들이마셨다. 열대야의 공기를 따라 연기가 폐 속으로 밀려들었다. 순간 머릿속에서 찰나의 장면이 스쳤다. 이 냄새. 리노를 처음 봤을 때 맡은 것이었다.

 

연기를 놀리는 리노의 모습은 마치 불씨로 기분을 좌우하는 마약 같았다. 적어도 후쿠에겐 그랬다. 타오를수록 맥박이 빨라졌고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리노가 마지막 숨을 뱉었을 때 불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후쿠는 리노가 들어간 후에도 한참을 창가에 있었다.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흩어지는 냄새를 붙잡으며.

 

 

 

요즘 부쩍 낮잠이 느셨어요.

 

후쿠의 머리를 빗겨주던 미츠요가 말했다. 얇은 결이 참빗을 따라 부드럽게 헤엄쳤다. 내가? 경대 앞에 앉아있던 후쿠가 하품을 했다. 아닌데……. 대답과 달리 눈꺼풀이 무거워 보였다. 잠자리가 불편하세요? 후쿠가 고갤 저었다. 불편할 건 하나도 없었다. 단지 낮과 밤이 바뀌었는데 그 과정이 못내 신경 쓰였다.

 

무슨 용기로 그랬을까.

 

평소 같았던 자정, 엊그제. 저녁잠 탓에 더는 졸리지가 않았고 리노의 말소리만이 맴돌던 방. 조르고 졸라 듣게 된 그것은 바다 너머에서의 경험담이었다. 눈이 푸른 사람들과 지냈고 죽어도 하기 싫은 공부를 죽지 못해 마쳤다고. 담담하게 얘기하는 표정에서 후쿠는 그 때의 공허함을 읽을 수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덧붙여봤지만 썩 와닿는 말이 나오진 않았다.

 

"그냥......못 하겠다고 집에 오면 되죠."

 

듣고 있던 리노가 실소를 터뜨렸다.

 

"나빼고 전부 의산데 그게 돼?"

 

머쓱해진 후쿠가 뒷목을 매만졌다.

 

"전부 의사일 필요가 있어요?"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누구의 꿈인지도 모를 공부에 떠밀려 수 년을 질식하듯 보냈다. 막상 졸업을 했을 때 후회는 없었지만 기쁘지도 않았다. 하라니 하긴 했는데 이런 어른으로 자라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게."

 

리노가 등받이에 기대며 건조하게 웃었다.

 

"나 뭐가 되고 싶었지."

 

끽해봐야 두 살 차이였지만 리노는 이따금 스무 살은 더 먹은 어른같았다. 한평생을 침대에서 보낸 저와는 많은 것이 달랐다. 바다를 건넜고 사람들을 만났고 대단한 공부를 했다. 솔직히 적성에 맞아 보이진 않았다. 그는 이따금 산만한 데가 있었고 뜻모를 노래들을 흥얼거렸다. 담배도 곧잘 피워댔다. 잘은 몰라도 몸에 좋은 건 아닌 것 같았다. 남의 병을 고쳐 밥벌이를 한다는 사람이 제 몸엔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뭔가를 배웠다. 해냈다. 후쿠에겐 처음 보는 리노의 이면, 그걸 발견한 후쿠의 시선은 기름등처럼 은은했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더 많이 알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도와주질 않았다.

 

"너 잠오지."

 

"아니요."

 

아닐 리가 없었다. 약기운에 눈꺼풀이 무게추처럼 가라앉고 있었다. 리노가 목을 젖히고 웃었다. 너 방금 표정 되게 웃겼어. 눈을 비비는 후쿠를 보며 리노가 자릴 털고 일어났다. 잘 자. ……. 내일 보자. 후쿠는 멀어지는 뒷모습에 못 박혔다. 빙긋이 웃던 얼굴과 이불을 덮어주던 손길이 자꾸만 떠올랐다. 잊을 만하면 그랬다. 잠이 오다가도 꿈에 나올 까봐 깼다. 누운 채로 몸만 뒤척이길 한참, 급기야 침대에서 일어난 건 새벽을 훌쩍 넘긴 때였다.

 

후쿠는 손을 입에 문 채 고민하고 있었다. 방문 앞이었다. 막상 나오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주무시면 어떡하지.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작게 소리를 냈다.

 

……선생님.

 

대답이 없었다. 이번엔 더 작게 두드려 보았다. 조용하던 문 너머에서 순간 인기척이 들렸다. 당황한 후쿠의 눈앞에 잠시 후 리노가 나타났다. 깼어? 어딘지 놀란 기색이었다. 후쿠는 할 말이 없었다. 갑자기 새벽에 보러 온 것에 무슨 이유를 대야 할 지 몰랐다. 돌처럼 서 있는 후쿠에게 리노가 물었다. 혹시 아파서 그래? 평소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후쿠는 그 사실이 좋았다. 리노의 걱정스러움이 좋았다. 후쿠가 미간을 좁히며 웃었다. 아픈 것 외엔 보러 올 핑계가 없는 사이였다.

 

리노는 다시 후쿠의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 맡에 앉아 걱정을 덜어주었고 증상에 대해서도 들어주었다. 다행히 큰 통증은 아닌 것 같았다. 후쿠에겐 가벼운 수면제가 처방되었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후쿠는 리노를 보고 있는 게 좋았다. 아파야 볼 수 있는 건 서러웠다.

 

새벽은 거의 저문 상태였다. 주변이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 리노는 책을 들었다. 온 김에 아침이 될 때까지 있을 요량이었다.

 

책장 넘어가는 소리만이 들리는 시간, 잠자코 집중하는 리노에게 문득 후쿠가 물었다.

 

무슨 책이에요? 리노는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야설. 후쿠가 목을 빼며 인상을 썼다. 장난이야. 그제야 고개를 든 리노가 협탁에 턱을 괸 채 키득거렸다. 넌 농담을 못하겠어. 사실이었다. 유학 생활을 할 때엔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이국 사람들에게도 곧잘 헛소리를 했는데 저보다 두 살이나 어린 후쿠에겐 맥을 못 췄다. 내가 철이 든 건지, 네가 대단한 사람인지, 리노는 후쿠를 볼 때면 그런 생각들이 종종 들곤 했다.

 

이게 요즘 동경에서 그렇게 유행이라네.

 

그렇게 말한 리노가 표지를 들어 보였다. 후쿠가 반쯤 감긴 눈으로 웃었다. 여기도 동경인데 나는 몰라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끌끌 혀를 차듯 웃은 리노가 문득 책을 내밀었다.

 

빌려 줄까.

 

…….

 

읽어 볼래?

 

그 때 무슨 용기로 그랬을까.

 

후쿠은 아직도 그것이 수면제 탓이라 믿는다.

 

……읽어주면 안 돼요?

 

 

 

-

 

 

 

올해는 어쩐지 장마가 짧았다. 주말에 바짝 내리던 비는 다시 무더위에 잠식되었다. 유난히 매미가 크게 우는 여름이었다. 그 대단한 소음에도 후쿠는 한 번을 깨는 법이 없었다. 혹시 잘못된 건 아닌지, 미츠요는 이따금 방에 들어와 후쿠를 확인했다. 낮과 밤이 완전히 뒤바뀐 모양이었다.

 

리노는 이틀을 기다리면 왔다. 그 다음엔 사흘을 기다려야 왔다. 주일에 두 번은 생각보다 적은 횟수였고 간격이 길었다.

 

―제, 열흘 밤의 꿈.

 

―작, 나스메 소세키.

 

후쿠는 그 이틀과 사흘 동안 동경에서 유행한다는 책을 구하려 애썼다. 일주일 내도록 줄을 서도 못 구하는 것인지라 백작에게 조르고 또 졸랐다. 하지만 어렵사리 구해온 책을 몇 장 읽기도 전에 채 닫아버린 것은, 뒷이야기를 먼저 알고 싶지 않았다. 차마 읽을 수가 없다는 게 맞겠다. 후쿠는 리노의 목소리가 스쳐간 부분만 다시금 반복했다.

 

―제가 죽거든 기다려 주세요.

 

―꼭 만나러 갈 테니.

 

―언제 만나러 오시나요?

 

이제 혼자서는 아무것도 읽지 못하더라도,

 

―바람이 불면 갈게요.

 

영영 글을 모르게 되더라도,

 

―그대 꿈속으로.

 

좋았다.

 

 

 

 

 

저……도련님.

 

아침나절 잠에 들던 후쿠에게 미츠요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감기던 눈이 커진 것도 그 때였다. 놔두고 가신 것 같아요. 후쿠의 손으로 건너온 그것은 마감이 잘된 상자였다. 뚜껑을 열자 잎에 쌓인 막대들이 보기 좋게 나열되어 있었다.

 

미츠요.

 

예, 도련님.

 

미츠요는 이게 뭔지 알아?

 

글쎄요. 미츠요가 고개를 갸웃했다. 듣기로는 양인들의 곰방대라고 하던데. 후쿠가 코를 대자 익숙한 냄새가 났다. 매캐하고 알싸했다. 아마 성냥을 피우면 불꽃이 일 것이다. 그 다음엔 연기도 피겠지. 후쿠는 담배를 무어라 부르는 지도 몰랐지만 피우는 법은 잘 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돌려줄게. 미츠요를 내보낸 다음 곽을 닫으려던 후쿠의 손이 문득 멈췄다. 이번엔 하나를 빼고는 다시 뚜껑을 닫았다. 빼낸 한 개비는 유행한다는 책 사이에 끼워두었다. 제일 좋아하는 장章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밤이었다. 창너머 불어오는 바람이 커튼을 흔들었고 리노는 소리 내어 책을 읽었다. 풀벌레들이 속삭이듯 우는 시간, 불현듯 하늘에서 형형색색의 빛이 튀어 올랐다. 놀란 후쿠가 밖을 내다보았다. 멀리 하늘에서 불꽃이 터지고 있었다. 마츠리다. 설명서 같은 리노의 목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둘은 나란히 창틀에 기댄 채 그 광경을 응시했다. 불꽃은 튀어오를 때마다 구름의 모양을 비추고 사라졌다. 남은 연기들이 달 주변을 파도처럼 어슬렁거렸다. 하늘이 아니라 바다처럼 보였다. 폭죽 소리가 뱃고동처럼 아득했고 구름 너머 우주는 심해처럼 깊었다.

 

아마 올 여름은 다음이 마지막일걸.

 

창틀에 턱을 괸 채 리노가 말했다. 후쿠는 태어나서 한 번도 불꽃을 본 적이 없었다. 불꽃은 커녕 동네 마츠리도 한 번을 못 나갔다. 후쿠는 목을 뺀 채 먼 하늘을 응시했다. 눈동자가 여러 가지 빛에 물들어 일렁거렸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던 리노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같이 갈래?

 

이번엔 후쿠가 리노를 돌아보았다.

 

아니 그냥.

 

많이 좋아진 것 같아서.

 

확실히 그랬다. 통증이 덜 해지건 물론이고 적당히 살이 올라 보기에도 좋았다. 지금처럼 밥도 약도 잘 챙겨 먹는다고 약속해. 리노의 말에 이번엔 후쿠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끝을 걸고 엄지를 맞대는 순간 하늘에서 마지막 불꽃이 일었다. 전에 없이 크고 아름다웠다. 유성우가 쏟아지듯.

 

 

 

백작은 괴로웠다. 금쪽같은 아들이 난생 처음 속을 썩이고 있었다. 그 몸으로? 절대 안 된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불을 쓰고 엎어지기를 사흘, 왕진을 할 때만 나오고는 다시 침대에 고꾸라졌다. 처음부터 백작이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결국 백기를 들었더니 나와서 한다는 말이 더 가관이었다. 유카타를 사달랜다. 아직 입지도 않은 것들이 차고 넘쳤다. 대답이 없자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결국 허락에 유카타에, 백작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아들에게 해다 바치기 바빴다. 그나마 합의는 귀가 시간으로 결정을 봤다. 자정은 넘기지 않기로 했다.

 

마츠리 당일은 여름의 끝물이었다. 날이 맑았고 사방에서 매미 소리가 났다. 백작은 아들이 타고 갈 사륜마차를 두 눈으로 직접 살폈다. 시종들이 마른 수건으로 자리를 털고 기다렸다. 이내 밖으로 나온 후쿠는 흰색 유카타를 입고 있었다. 새 옷을 사달래서 사줬더니 막상 입은 건 한참 전에 사두고 안 입던 옷이었다. 보통 변덕이 아니었다. 백작이 한숨을 쉬며 사륜마차에 오르는 후쿠를 토닥였다. 그 뒤를 약에 수건에 여벌의 옷까지 챙긴 미츠요가 따라붙었다. 백작은 옥외 대문까지 나와 가는 모습을 확인했다. 간이 창문으로 얼굴을 내민 후쿠가 떨어져라 손을 흔들었다. 웃는 낯에 생기가 가득했다.

 

시내는 들뜬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신을 기리는 축제의 마지막, 모두가 환희했고 모든 것이 절정이었다. 리노는 관청 앞에서 후쿠를 기다렸다. 도로의 양옆으로 수국이 만개했다. 사방이 푸르렀다. 부채질을 할 때마다 수국향이 떠돌았다. 인력거 소년들이 자주 호객 행위를 했다. 웃으며 거절하던 리노의 부채질이 문득 멈췄다. 사륜마차 하나가 관청 앞에 섰다. 열리는 문 사이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부축을 받은 후쿠가 조심스레 내렸다. 옷자락을 잡은 손에서 긴장이 느껴졌다. 리노에게 다가간 미츠요가 고갤 조아리며 당부했다. 선생님, 우리 도련님 잘 좀 부탁드려요. 리노는 대답이 없었다. 물끄러미 후쿠를 보고만 있었다. ……선생님? 그제야 인사를 받은 리노가 겸연쩍게 웃었다.

 

조금씩 해가 지고 있었다. 좌판을 낸 상인들이 저마다 가로수에 등을 달았다. 머리 위로 잉어 모양의 연등이 줄을 지어 헤엄쳤다. 하늘이 어두워질수록 거리는 밝아졌다. 목마를 탄 아이가 솜사탕을 흔들었다. 동경의 모든 어린이와 어른과 노인들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날이었다. 연인들은 옷깃을 스치며 걸었다. 후쿠는 고개를 어디 둬야 좋을지 몰랐다.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입이 떡 벌어졌다. 환호와 노동요로 온 세상이 환호했다. 인파에 떠밀린 탓에 둘은 저도 모르는 사이 손을 잡고 있었다. 손깍지를 낀 채 행렬을 따라 부지런히 움직였다.

 

신이 난 후쿠가 좌판 여기저기를 오갔다. 여우 가면인 기쓰네멘을 써보았다. 생각보다 괜찮았다. 평생 환자로 산 것 치곤 닌자가 어울렸다. 둘은 설탕물을 바른 포도를 나눠먹었다. 금붕어 건지기도 했다. 유리 어항을 내려다보던 후쿠가 팔을 걷어 붙혔다. 용감하게 도전했지만 처음 해봐서 그런지 쉽지 않았다. 물에 닿기 무섭게 뜰채의 종이막이 녹아내렸다. 잘 되지 않자 후쿠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왔다. 후쿠를 살피던 리노가 주인에게 몰래 웃돈을 건넸다. 그제야 주인이 다른 뜰채를 챙겨 주었다. 돈의 힘인건지 결국 한 마리를 건져내는데 성공했다. 후쿠가 손뼉을 치며 발을 굴렀다. 게다를 신은 발이 작았다. 걸을 일이 없어 발도 자라지 않았다고 들었다.

 

둘은 사람들을 따라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공원의 시계탑 주변에선 훈도시를 입은 남자들이 북을 치며 빙빙 돌았다. 후쿠가 건져낸 금붕어는 리노가 들었다. 어스름하게 밤이 오는 중이었다. 축제의 마지막. 가늘게 줄지은 행렬이 외곽의 신사까지 이어졌다. 호수 위는 이미 띄워 보낸 연등이 반딧불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신사 앞에서 리노와 후쿠는 손을 모아 합장했다. 백발에 등이 굽은 신쇼쿠가 어린 네기들을 이끌고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네기들은 끽해야 열 살을 겨우 넘긴 듯한 소년들이었다. 하나같이 소매가 넓은 무복을 입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리노와 후쿠에게 소원을 적는 종이와 연등을 건넸다. 리노가 연등을, 후쿠는 종이를 들고 조각배 위에 올랐다.

 

사방이 고요했다. 물 위로 노 젓는 소리와 이따금 담수어들이 헤엄치는 소리가 더할 나위없이 평화로운 밤이었다. 리노는 사람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노를 멈췄다. 수면 위로 보름달이 어른거렸다. 둘은 연등에 의지해 무릎에 종이를 댄 채 소원을 적어내렸다. 리노가 훔쳐보는 시늉을 하자 후쿠가 손바닥으로 가림막을 만들었다. 적은 종이는 곱게 접어 연등 안에 넣었다. 연등을 든 채 가만히 앉아있는 후쿠에게 리노가 손짓했다. 이제 물에 띄워야 해. 한 번도 해본적이 없으니 오늘 후쿠는 모든 행동이 어설펐다.

 

후쿠가 띄운 연등이 서서히 물길을 찾아 나아갔다. 곧 다른 연등에 부딪히고 섞이더니 멀리 빛을 발하며 어딘가로 흘러갔다. 물결이 조용히 일렁거렸다. 후쿠는 리노에게 호수 끝에 뭐가 있는지 물었다. 리노라면 무엇이든 알 것만 같았다. 리노는 강이 나오고 강이 만나면 바다가 있다고 했다. 후쿠는 바다를 그림으로만 봤다. 얼마나 깊고 대단한 물인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리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여기서 오래 헤엄치면 제가 공부했던 데에 갈 수 있다고. 듣고 있던 후쿠가 실소를 터뜨렸다. 그 전에 빠져 죽을 것 같은데요. 리노는 목을 젖히며 웃었다. 침대에서 살았지만 마냥 순진하진 않은 것 같았다.

 

다시 관청 앞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한밤이 지난 후였다. 마차 앞에서 웃옷을 들고있던 미츠요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도련님 늦으셨어요, 자정까진데. 어딘지 책망하는 목소리로 얼른 외투를 몸에 둘러주더니 리노에게 손짓을 했다. 타셔요. 바래다 주시래요.

 

둘을 태운 사륜마차가 기분 좋은 속도로 동경 시내를 달렸다. 거리는 축제의 열기가 빠진 탓에 서늘했다. 낮은 여름이지만 밤은 가을에 접어들고 있었다. 환절기였다. 간이창으로 밤바람이 불어왔다. 맞은 편에서는 미츠요가 졸고 있었다. 미츠요의 규칙적인 숨소리와 옆에 앉은 리노의 존재감에 후쿠는 묘한 긴장감이 들었다. 허벅지 위에 올려둔 금붕어 봉투를 말없이 매만지기만 했다.

 

오늘 밤이 지나면 다시 사흘을 기다려야 한다. 사흘 뒤에 보면 다시 이틀을 기다려야 한다. 여기서 더 오래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아파야만 찾아오는 사람이라니. 그렇다면 나았을 땐 더는 만나지 못한다는 걸까.마치 리노를 보려면 계속 아파야 한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정신이 나간게 분명했다. 어디 술이라도 퍼마시고 온 사람인양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후쿠는 저도 모르게 자꾸 리노를 곁눈질했다. 둘은 잠시간 눈이 마주쳤다. 리노는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았다. 쳐다보는 눈빛이 어디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나른했다. 후쿠는 리노가 무슨 소원을 빌었을지 궁금했다. 앞으로도 영영 궁금할 터였다.

 

마차가 멈춘 곳은 시내의 중심가였다. 말리는 미츠요에게 금붕어를 떠민 후쿠가 리노를 따라 내렸다. 낮은 가로등에 리노의 얼굴이 어렴풋이 비쳤다. 재밌었어? 후쿠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오시면 안 돼요? 그게 힘들면 제가 갈게요. 그렇게 말하고 싶어 목울대가 다 아팠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리노가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나도 재밌었어. 이번엔 후쿠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잘 가.

 

후쿠가 다시 마차에 오를 때까지 리노는 서서 마중을 했다. 후쿠는 자리에 앉자마자 간이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이내 돌아가려던 리노가 문득 후쿠를 돌아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런 약속을 했다.

 

다음엔 바다에도 가자.

 

꼭 데려갈게.

 

 

 

-

 

 

 

삼월의 하늘은 안개처럼, 구름처럼 향기가 퍼져요.

 

어서, 어서 보러가자. 사쿠라아.

 

온 방이 금목서 냄새와 미츠요의 흥얼거림으로 가득했다. 이 맘때면 후쿠는 미츠요를 따라 정원에서 금목서 꽃을 땄다. 따낸 꽃은 잎을 하나씩 뜯어 면으로 된 주머니에 옮겨넣었다. 그걸 빨래에 묻어두면 가슴 한켠이 뭉클할만큼 좋은 냄새가 났다. 가을이 올 때마다 그렇게 했다.

 

미츠요.

 

예에, 도련님.

 

후쿠가 방직 주머니를 접으며 물었다. 있잖아, 혹시 바다를 본 적이 있어? 후쿠의 말에 미츠요가 흔쾌하게 끄덕였다. 그럼요, 저는 어머니가 해녀였으니까요. 어릴 때에 듣기론 미츠요는 멀리 야마구치에서 올라왔다고 했다. 육지 사람을 싫어했던 엄마를 따라 해녀가 되고 싶었지만 물이 무서웠댄다.

 

“그럼 미츠요, 바다도 실제로 보면 무서워?”

 

물이 무섭다는 미츠요에게 후쿠가 되물었다. 미츠요가 으음하고 앓는 소릴 냈다. 사실 미츠요는 물보다 돈이 무서웠다. 해녀로는 밥벌이가 제대로 되지 않아 늘 힘들었다. 미츠요는 바닷물의 푸르스름한 기억을 차분하게 이어 붙이며 말했다. 무섭지 않아요. 사실 말도 못하게 아름다와요. 미츠요의 말에 후쿠가 눈을 깜빡였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설명 해주면 안 돼? 도련님은 목소리가 참 좋다. 그런 생각을 하며 유카타를 다리던 미츠요가 빙긋이 웃었다.

 

바다는 하늘이 물 속에 있답니다.

 

태양도 삼키는 곳이에요.

 

 

 

마츠리에 다녀온 이후로 후쿠에겐 이틀과 사흘을 기다리는 일이 보통 힘겨운 게 아니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다가도 대뜸 침대에 드러누워 나츠메 소세키의 책을 소리내어 읽었다. 그렇게 해야 견딜수가 있었다. 바람이 불면 갈게요. 그대 꿈속으로. 유독 그 장만 닭도록 읽은 탓에 종이 끝이 찢어질듯 바랬다. 다 읽은 다음엔 꽂아둔 담배를 피우는 시늉도 했다. 그 순간만큼은 하늘부터 태양까지 삼킨다는 큰 물을 건너, 힘든 공부를 이겨내고 온 사람처럼 뿌듯했다.

 

그 사이 몰라보게 건강해진 후쿠를 보며 백작은 리노와 가문에게 거듭 고마워했다. 리노의 조부모를 따로 만나는 일도 더러 있었다. 백작은 된 사람이었다. 은인이라 여겨 최대한 정성스러운 저녁을 대접했다.

 

식사 자리에선 많은 얘기들이 오갔다. 동경과 심장병과 수많은 경조사들. 최근 리노는 얼굴도 모르던 친척들의 혼인식에 자주 불려갔다. 갈 때마다 한 마디씩 보태는 근심들이 그 날 식탁 위에서 똑같이 반복되었다. 조부는 막내 손자의 앞날에 자주 탄식을 했다. 여자에게 통 관심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 놈 빼곤 다 식을 올렸는데 스물 하나 먹어서는 여태 아무 생각이 없습디다.

 

사실 백작이 멀찍이서 보아도 리노는 그랬다. 멀쩡하다 못해 준수한 용모와는 달리 여자 얘기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귀한 아들을 고쳐준 은인이니 백작은 조부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고민도 했다. 두어 번 얘기가 더 나왔을 땐 직접 대답을 꺼냈다. 토쿠이徳井 가문에 아는 이가 있다고. 이제 열아홉이니 후쿠와 동갑인데 여태 시집을 가지 않아 리노만치 웃어른들이 걱정이 많다고. 백작의 설명에 조부가 묘한 관심을 보였다. 리노의 부친도 고갤 끄덕였다.적잖게 명문가이니 일찍이 보냈을 법도 한데 혼자 미혼인 것은 여식이 어지간히 귀하게 컸기 때문이리라. 한참 말을 잇던 백작이 조부의 손을 잡으며 결론을 지었다. 조만간 자릴 만들어 보겠습니다.

 

 

 

환절기가 저물었다. 완연한 가을이 오고 있었다. 후쿠의 옷과 이불에선 금목서가 만개한 것처럼 향이 났다. 리노는 금목서가 무엇인지 몰랐다. 바다 건너 이국에는 그 나무가 없었는지 후쿠에게 무슨 냄새냐 묻고 좋다고 했다. 그 사이 둘은 나츠메 소세키의 책을 모두 읽었다. 새로운 책을 찾지는 않았다. 그냥 마주 앉아 후쿠가 잠들기 직전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소설 속 문장보다 서로의 한 마디가 더 신기했다. 건강하게 웃는 후쿠를 보고 있자니 리노는 그렇게 배우기 싫었던 모든 것들이 처음으로 자랑스러웠다. 스스로에게 비범한 확신이 들었다. 의사가 되길 잘했다고.

 

그즈음부터였을까. 저택에 가지 않는 밤이면 리노는 꿈을 꿨다. 꿈 속은 언제나 볕이 따뜻했고 미지근한 파도가 밀려드는 해변가였다. 그곳에서 후쿠는 달릴 수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다는 백사장의 모래를 밟으며 리노에게 달려왔다. 리노는 후쿠를 껴안으며 후쿠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왜인지 그래도 되는 사이였다. 후쿠의 정수리에선 바다 냄새가 났다.

 

그렇게 사흘과 이틀을 내리 그런 꿈을 꿨다. 처음엔 손을 잡았다가 이튿날엔 끌어 안았고 사흘째엔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마지막엔 입을 맞췄다. 꿈에서 깼을 땐 늘 한밤중이었다. 심장이 해괴할 정도로 뛰고 있었다. 등허리는 땀에 절어 끈적했다. 이해가 되질 않았다. 제가 미친놈처럼 느껴졌다. 몽정을 할 때도 이런 꿈을 꾼 적은 없었다. 앞으로 후쿠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내 꿈에 네가 나왔거든, 왜 내 꿈에 나왔어?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후쿠를 볼 때면 꿈 생각이 나는 건 더 황당한 일이었다. 뭐가 꿈이고 어디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꿈 속에서처럼 그래도 될 것만 같았다. 아니, 꼭 그런 사이가 되고 싶었다. 약을 먹고 잠든 후쿠를 보고 있을 때면 어느새 숨이 찰만큼 가슴이 답답했다. 리노는 더이상 책을 읽지 않았다.후쿠를 보고만 있어도 시간이 꿈처럼 지나갔다. 바다에 간다는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으니 미쳤다고 밖에 적당한 표현이 없었다.

 

결국 며칠을 밤새 불면하던 리노가 결단을 내렸다. 백작을 찾아갔다.

 

"여태 살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말인즉 후쿠가 건강을 찾았으니 이제 왕진을 끝내겠다는 얘기였다. 백작은 무던히 말렸다. 나이가 들어서도 어떻게든 아들을 봐달라며 부탁했다.

 

리노가 온 뒤로 백작은 후쿠의 상태를 제법 유심히 살폈다. 한 번도 본 적없는 생기였다. 이제 다른 사람들처럼 살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스무 해 못 넘긴다던 무녀에게 가서 보여주고 싶을 만큼 건강한 낯빛이었다. 그러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비 된 입장에선 후쿠가 딸이었으면 진작 시집이라도 보냈을 터였다.

 

백작의 부탁에 리노가 고갤 저으며 웃었다. 제 할 일을 다했다며 구실 좋은 말을 꺼냈다. 아드님에 대한 제 속을 알면 당장에 뺨이라도 맞을 일을 그런대로 잘 포장했다. 리노는 제가 단단히 돌았다고 생각했다. 돌은 놈치곤 공손하게 표정 관리까지 하니 기가 찼다. 거듭된 부탁을 고사하는 리노에게 결국 백작이 졌다. 그간 고마웠다며 단정히 허릴 숙였다. 단언컨데 그에겐 은인이었다. 조만간 좋은 자릴 마련하겠다며, 손사레 치는 리노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워했다.

 

 

 

계절이 한 바퀴를 돌아 완연히 넘어가는 시간, 그동안 많은 일들이 었다. 리노와 후쿠는 알게 된 지 백 일을 조금 넘겼고 옷을 벗기고 소릴 지르며 싸웠고 마츠리에 다녀왔다. 소원을 빌었다. 여전히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는 서로 몰랐다. 저물어가는 가을. 마지막 날에 둘은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 후쿠는 부러 약을 먹지 않았다. 잘 수 없었다. 자면 안 되는 밤이었다. 마츠리에서 돌아오던 길에 생각했던 것이 맞았다. 아프지 않으면 더는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리노의 결정보다도 건강해진 자신이 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후쿠는 서운함을 지우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제가 다시 앓게 되면 돌아올래요? 듣고 있던 리노가 나즈막하게 웃었다. 그런 말 하지마. ……. 아프지마. 왜인지 고갤 들기가 힘들었다. 눈이라도 마주쳤다간 바다 건너로 가서 단 둘이 살자는 말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튿날 조부가 리노를 잠시 불렀다. 조만간 백작네 집에서 저녁을 먹게 된다는 얘길 전했다. 그러면서 처음 듣는 가문에 대해 말을 꺼냈다. 아사코라는 여자의 이름도 나왔다. 그건 안 된다는 리노의 말허리를 조부가 단호하게 잘랐다. 생애 두 번은 없을 기회라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그래서 지금 안 만나면 다른 누군가 있다는 게냐. 조부의 물음에 리노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있다 한들 데려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 편이 다행인지 몰랐다. 어디 말할 데도 없는 마음이었다. 분명한 비역질이었다. 결실도 맺지 못할 행위. 리노는 머릿속에 있던 후쿠의 얼굴 대신 아사코의 이름을 우겨 넣었다. 잠자코 있다 가만히 고갤 끄덕였다. 대답은 않고 고개만 한참을 끄덕였다.

 

 

 

평소보다 유난히 정원이 깨끗했다. 정원사들은 낙엽을 쓸어모으기 바빴다. 로비부터 연회장까지 온 저택이 분주했다. 오늘은 미츠요까지 덩달아 그랬다. 후쿠에겐 평소에 잘 입히 않는 기모노를 입혔다. 검정색 하오리도 걸쳤다. 질 좋은 옷감을 몇 장씩 겹쳐 입혔더니 마른 몸에도 제법 태가 났다. 미츠요는 도련님이 퍽 미남이라 생각했다.

 

해가 저물 즈음 저택은 성대하게 반짝거렸다. 초여름 리노가 처음 왔던 그날보다 훨씬 북적였다. 그때보다 사람이 배로 많은 탓이었다. 후쿠는 백작의 옆에 서서 오는 사람들을 맞았다.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태 침대에만 누워 있다 이렇게 나오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 날 후쿠와 리노는 식사 자리에서 아사코를 처음 만났다. 아사코. 이름처럼 수채화 같은 여자였다. 사람들이 부러 자릴 비켜가며 리노의 곁에 아사코를 앉혔다. 리노의 조부와 아사코의 부친이 백작의 권유로 악수를 나눴다. 백작이 나서서 서로의 가문과 지위를 설명해주었다. 면면한 웃음과 감탄사가 오가는 자리였다. 그 날 후쿠는 혼인이란 말에 박수를 쳤다. 멍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따라했다. 멀찍이 맞은 편에 앉아 넘어가지 않는 밥을 억지로 씹었다. 그러면서도 이따금 리노와 눈이 마주쳤다. 한참이나 서로를 보다가 다시 고갤 숙이고 결국 다시 시선이 얽히는 게 반복되었다. 리노는 아사코의 얘기에 귀를 대다가도 저도 모르게 후쿠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영영 볼 수 없는 사람인양, 눈 안에 통째로 집어넣고 갈 것처럼 물끄러미 그랬다.

 

그날 밤 후쿠는 자해했다. 마치 처음부터 나은 적 없던 사람처럼 다시금 앓기 시작했다. 시름시름 하다못해 침대에 누워 일어나기도 힘들어졌다. 받아온 약을 먹고 쉬어봐도 이상하리만치 낯이 창백하게 쇠었다. 몸은 자꾸만 야위었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 일이 많아졌다. 어느새 눈앞으로 입김이 흩어져내렸다. 바람에서는 낙엽 태우는 냄새가 났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후쿠는 나츠메 소세키의 책을 꺼냈다. 손때가 탄 장을 한 번에 펼쳤다. 눈을 감고서도 단번에 집을 수 있을만큼 읽었다. 종이 끝이 말리다 못하 바스라진 태였다. 그 안에서 후쿠는 꽂아둔 담배를 빼냈다. 끝이 조금 젖은 것만 제외하면 모양이 그대로였다.

 

이번인 미츠요에게서 훔친 성냥을 그었다. 불을 붙이자 어두운 방 안에서 불씨가 훅 일어났다. 리노가 했던 것처럼 앞을 태우고 손을 흔들어 불씨를 죽였다. 생애 처음으로 피우는 담배였다. 창틀에 기댄 채 볼이 패일 정도로 연기를 마셔보았다. 목구멍이 따갑고 이내 기침이 터져나왔다. 억지로 참아가며 한 개비를 다 태웠다. 눈물이 펑펑 쏟아질만치 매웠다.

 

도련님.

 

언젠가 미츠요가 그랬다.

 

마음 접으셔야 합니다.

 

후쿠는 눕지도 앉지도 않은 자세로 되물었다. 무슨 뜻이야? 미츠요의 눈가가 이미 벌겋게 잠긴 후였다. 미츠요가 단정한 걸음으로 후쿠에게 다가왔다. 옷깃을 정리해주고 목을 가만히 쓸었다. 잠결에도 찾는 이름을 제가 모를 수 있나요. 자장가처럼 다정한 목소리가 단호하게 타일렀다.

 

그래도 안 됩니다.

 

그 분은 안 돼요.

 

그 날 후쿠는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아직도 기억을 못한다.

 

……왜?

 

분명 되물었던 것 같은데 그냥 가만히 미츠요를 돌아보았던 것만 떠올랐다. 미츠요는 말없이 손을 뻗었다. 야위어 가는 도련님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미어지는데 해줄 수 있는게 없었다. 엉망으로 번진 얼굴을 닦아주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심장의 병인지 마음의 병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

 

 

 

그해 동경은 폭설이 내렸다. 쌓인 눈이 녹기도 전에 새로운 눈이 다시금 쏟아졌다. 어디선 사람이 죽고 어디선 동물이 죽었다고 야단이 났다. 그 야단 속에 백작의 저택이 있었다.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오밤중에 갑자기 현관이 울렸다. 하얗게 질린 백작이 거기 서 있었다. 리노의 가문에 다시 찾아올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백작은 조부를 붙들고 무릎을 꿇다시피 빌었다. 아들이 이상하다고. 피를 토했다는 말만 몇 번을 해댔다. 뒤따라온 미츠요는 리노의 오비에 매달렸다. 도련님에게 가달라고 울고 불며 외쳤다.

 

다시 돌아온 저택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후쿠는 처음 봤던 때처럼 꼿꼿이 앉아있지 못했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 돌아온 리노를 올려다본 게 전부였다. 아프니 정말 돌아왔다. 새삼스럽게 기뻤다. 리노는 밤새 옆에 앉아 있었다. 더는 아무런 약도 들지 않았다. 먹어봐야 그대로 피바다를 만들었다. 새빨간 새벽. 아침까지 한참은 남은 어떤 시간이었다. 정확한 때를 알 수 없었다. 방 안은 둘의 숨소리만 오갔다. 후쿠가 곁에 앉은 리노에게 손을 뻗었다. 뻗은 손을 조용히 잡았다. 하얗게 질린 낯으로 웃었다.

 

카제가후키마스네.

 

바람이 부네요.

 

잡은 손에 힘이 실렸다.

 

생의 마지막, 참 용한 무녀가 아닌가.

 

스무 해를 넘기지 못한 비망록이었다.

 

 

 

-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던 새해가 그렇게 왔다. 리노는 아사코와 무사히 식을 치뤘다. 시내 중심가에서 양장을 입고 제단된 생화에 둘러싸여 하루를 보냈다. 가문에서 양장을 입은 첫 사람이었다. 리노는 생애 가장 말끔한 모습으로 주례를 듣고 축하를 받고 영원을 맹세했다. 아사코는 전에 없이 행복해보였다. 이듬해 봄에는 우리 사이에 아들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말도 할 줄 아는 여자였다. 베시시 웃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신혼 여행은 상해로 결정되었다. 유람선을 타고 남쪽 바다를 건너 한 달을 머물고 올 예정이었다. 아사코의 조부모가 상해에서 철도업을 한다고 했다. 익히 들은 바로 그곳에서 어지간히 부를 쌓았다고. 앞으로 먹고 살 걱정은 없겠다며 리노의 형이 웃었다. 의원을 개업하든 놀고 먹든 뭘 해도 살만한 인생이 되었다.

 

상해로 가는 바닷길은 평화로웠다. 수면 위를 거니는 볕이 아름다웠고 밤엔 별이 쏟아질듯 많았다. 어두운 바다 속에서 유람선만 금성처럼 반짝였다. 저녁부터 시작된 연회가 절정이었다. 리노는 떠들썩한 분위기를 등지고 조용히 갑판으로 빠져나왔다. 멍한 표정으로 난간에 팔을 기댄 채 밤바람을 맞았다. 극지방에서 실어 나르는 서늘한 북풍에도 가슴이 뜨거웠다. 그해 봄처럼 취기가 올랐다. 시간을 돌려 너를 만날 수 있게 해준다면 나는 그럴 수 있을까. 아마 골백번도 더 그럴 것이다. 그 때엔 아사코 대신 네 이름을 머릿속에 우겨넣고 반드시 고해바칠 것이다.

 

사랑한다고.

 

그것은 죄책감에 떠밀린 말이 아니었다. 동정 따윈 더더욱 아니었다. 한숨을 쉬던 리노가 얼굴을 감쌌다. 웃음 같은 울음이 나왔다. 바람이 부네요. 그제서야 속을 깨달았다. 미친 짓이었다. 형벌처럼 무거운 밤, 바다가 칠흑 속에서 고요히 일렁였다.

 

 

 

1890년 메이지 유신, 이것은 그해 겨울에 있었던 일이다. 동경발 상해로 가던 유람선에서 일본인 승객 한 명이 실종되었다. 갓 스물을 넘긴 그는 아름다웠고 전도유망했으며 그저께 혼인한 청년이었다. 그 밤 신부는 신랑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며 선착장에서 흐느꼈다. 이상한 정황과 유족들의 필사적인 거부에 사건은 신문 어느 한 켠에도 실리지 않았다. 누구는 신랑이 그럴 리 없다고 했고, 누구는 신랑을 보긴 봤다고 전했다. 그 날 거기 서 있던 사람이 그 사람 아니냐고. 그 사람, 바다로 간 거 아니냐고.

 

창백한 바다로,

 

바람이 분다.

 

꿈속으로 분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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