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마법사를 사랑하는 102가지 방법

W. 유랫

 

"안녕. 난 이민호라고 해. 넌 필릭스지?"

 

 

 

 

 

대뜸 나타나 묻지도 않은 신상을 알려주고 자연스럽게 일행처럼 필릭스의 어깨에 제 팔을 두르고 걷는 낯선사람에 필릭스는 무척 당황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야자가 끝난 11시에 빛이라곤 위태로운 가로등이 전부인 골목에서 생을 마감하는 건가 싶었던 필릭스가 대한민국 경찰서 번호를 고민하는 동안, 민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마법사야."

 

 

 

 

 

필릭스는 이제부터 민호를 낯선 사람 대신 조금 미친 사람으로 수식하기로 했다. 뿅 튀어나와서 한다는 말이 난 마법사야 라니, 신고를 당해도 쌌다. 잠깐, 뿅 튀어나와? 일순간 필릭스의 사고가 정지했다. 그와 동시에 같이 멈춘 발에 민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필릭스의 기억의 오류가 아니라면, 분명히 민호는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서 갑자기 제 앞을 가로막으며 나타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필릭스는 시력이 좋은 편이었고 기억력도 나쁘지 않았다. 물음표 대신 거꾸로 뒤집힌 물음표가 자리 잡은 필릭스의 얼굴에 민호가 웃느라 굽혔던 허리를 펴고 말했다.

 

 

 

 

 

"난 사랑의 마법사, 이민호야. 너 사랑 같은 거 한 번도 안 해봤지?"

 

 

 

 

 

내가 너 같은 안쓰러운 애들 연애 한번 시켜보겠다고 얼마나 힘든지 알아? 마법을 부리기 전에 좀 사귀어보란 말이야. 얼굴도 괜찮은데 뭐가 문제인지 도대체... 민호가 열심히 떠들어대는 말들을 필릭스는 건성으로 들으며 이 조금 미친 사람을 믿어도 될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근데요. 한참을 가만히 있던 필릭스가 불쑥 제 말을 끊자, 신세한탄을 하던 민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필릭스를 쳐다봤다. 지나치게 동그랗고 반짝거리는 두 눈에 필릭스는 그가 정말 마법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패기있게 민호의 말을 끊고는 가만히 있는 필릭스에 민호가 제 미간을 한번 찌푸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필릭스가 쭈뼛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그쪽이 마법사인건.. 어떻게 믿어요?"

 

 

 

 

 

이건 또 뭔 말이람. 질문의 의도를 잘 파악하지 못한 민호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다가 이내 경쾌하게 대답했다. 하늘을 날면, 믿을래? 잔뜩 올라간 민호의 왼쪽 입꼬리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던 필릭스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의심 반, 기대 반으로 물든 필릭스의 눈빛을 쉽게 읽어낸 민호가 피식 웃으며 필릭스에게 제 손을 내밀었다.

 

 

 

 

 

저도 같이 날아요? 질문하면서 민호의 손위에 제 손을 올린 필릭스에 민호는 웃음으로 대답했다. 손 줬으면서 그건 왜 물어? 그냥, 혹시나 해서요. 필릭스의 영양가 없는 대답에 제 어깨를 한번 으쓱 올린 민호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Любовь ах, лети далеко . 민호가 작게 주문을 외우자 맞잡은 손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민호가 대충 손을 허공에 휘젓자 불빛이 필릭스의 몸을 둘러쌌다. 누추한 골목길 가로등 따위랑은 비교조차 안 될 반짝임이었다. 필릭스는 입을 벌린 채로 제 손(정확히는 민호와 맞잡은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때, 신기하지? 신기하지 않다고 대답하면 머리를 한 대 때릴 것 같은 민호의 말투에 필릭스가 연신 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민호와 필릭스는 정말 날았다. 몸이 붕 뜨는 감각은 썩 좋진 않았지만 구름 옆에서 바라본 동네는 아름다웠다.

 

 

 

 

 

팔짱을 끼고 동네를 한바퀴 빙 둘러본 민호가 어때? 라고 말을 건네며 필릭스를 돌아봤을 때, 필릭스는 입을 벌리고 제 발아래를 쳐다보고 있었다. 민호는 놀이공원에 처음 온 아이를 보는 것만 같아 웃음이 터졌다. 민호가 마법사로서 기쁨을 느끼는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였다.

 

 

 

 

 

필릭스는 한참 동안 반짝거리는 건물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민호는 저게 전부 대한민국의 미친 노동력의 지표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필릭스의 말간 얼굴을 잠시 감상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필릭스에게 동화되어 오랜만에 동심의 세계로 들어가려던 민호는 필릭스의 말에 의해 현실로 돌아왔다.

 

 

 

 

 

"저기 근데... 저 멀미나는거같.. 웁"

 

 

 

 

 

야 야 스탑 안돼 토하지마 좀만 참아봐 야! 민호가 급하게 소리를 치며 해제마법을 걸 준비를 했다. 숨을 크게 들이쉰 민호가 주문을 외웠다. Любовь, отпусти меня . 그러자 민호와 필릭스를 감싸고 있던 빛들이 순식간에 깨지며 공중에서 사라졌다.

 

 

 

 

 

마법이 풀렸으니 공중에서 떨어지는 건 당연한 절차였다. 너무 급한 바람에 다짜고짜 해제주문부터 걸어버린 것이 원흉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는 민호의 변명은 나중 일이었다. 상공에서 아스팔트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제 몸에 겁을 있는 대로 먹은 필릭스가 소리를 내질렀다.

 

 

 

 

 

야 조용히 해! 민호가 소리쳤지만 패닉상태인 필릭스에게 들릴 리가 만무했다. 떨어지는 와중에도 민호는 침착하게 착지위치를 계산해 그곳에 텔레포트 마법을 걸었다. Любовь моя, отвези меня обратно. 텔레포트 게이트에 빨려 들어가기 직전에 필릭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감았던 두 눈을 살며시 떴을 때, 민호와 필릭스는 필릭스의 집 앞에 와있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필릭스의 옆집 이웃이 내버린 망가진 쇼파 위에 있었다. 두 팔과 다리가 엉킨채로 누군가가 버린 쇼파에서 숨을 고르는 두 남자. 누가 봐도 이상한 그림이었다.

 

 

 

 

 

그러나 연신 헛구역질을 해대는 필릭스와 연달아 마법을 쓰는 바람에 잔뜩 늘어진 민호가 이를 눈치채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지나가던 주민의 손가락질이 아니었다면 꽤 오래 그곳에 머물렀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필릭스를 따라 그의 집으로 들어가는 민호는 어째서인지 웃는 낯이었다.

 

 

 

 

 

필릭스가 제 방이라고 소개한 곳은 이층침대와 책상 두 개, 옷장 한 개가 전부인 깔끔을 넘어 휑한 방이었다. 잡동사니 따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방 주인의 의지가 엿보이는 바람에 민호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혼자 깔깔대는 민호를 의아하게 바라본 필릭스가 민호를 침대 위에 앉히곤 그의 맞은편 바닥에 앉았다. 일말의 언질도 없이 그저 자초지종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에 민호가 지체없이 입을 열었다.

 

 

 

 

 

"아까도 들었겠지만 난 마법사야. 여기 온 이유는 너에게 사랑이란걸 경험하게 해주기 위해서고. 나랑 계약을 하면 돼. 사랑의 계약."

 

"전 사랑 필요없는데요?"

 

"어? 진짜?"

 

"네 진짜.."

 

 

 

 

 

 

 

필릭스는 민호의 말에 고개를 푹 숙이고 애꿎은 제 손톱만 뜯어댔다. 필릭스는 정말로 연애가 필요 없었다. 같이 사는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고, 주말엔 늦잠을 자고 가끔은 함께 피씨방에 가는 일상으로도 행복은 충분했다.

 

 

 

 

 

그래도, 궁금하지 않아? 사랑이란 거. 민호의 말에 필릭스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온종일 그 사람 생각밖에 안 나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아무것도 안 해도 행복하다는 민호의 사족에 필릭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황홀하고 즐거울거야. 사랑이란 게 그렇거든."

 

 

 

 

 

민호의 설득에 필릭스는 결국 두 손을 들었다. 할게요, 계약. 필릭스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민호가 싱글벙글 웃으며 제 품 안에서 나무로 된 완드를 꺼냈다. 계약 전용 완드라는 말을 들은 필릭스가 감탄사를 뱉었다.

 

 

 

 

 

"Любовь моя, дай мне знать."

 

 

 

 

 

민호가 두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자, 큰 빛이 일렁임과 동시에 푸른색 마법진이 민호의 손등에 새겨졌다. 민호가 줄곧 목에 차고 있던 목걸이를 열자, 그 안에 작은 글씨로 0%가 적혀있었다. 민호는 이것이 필릭스의 마음과 연동되어, 100%가 되면 계약은 자동으로 해제된다고 설명했다.

 

 

 

 

 

 

 

 

 

민호와 필릭스는 바닥에 간이책상을 펴고 마주 앉았다. 책상에 그려진 해맑게 웃고 있는 뽀로로를 본 민호가 빵 웃음을 터트렸다. 필릭스는 이럴 때마다 제 친구의 취향이 조금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질 것만 같았다. 민호는 필릭스에게 마법의 노트 한권을 누고는 맨 위 칸에 이렇게 쓰라고 지시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102가지 방법. 필릭스는 이상한 자세로 연필을 쥐고 열심히 글자를 써내렸다. 필릭스는 그 밑 칸에 번호를 적고 민호가 말하는 것들을 끝없이 받아적었다. 22번째까지 쓰던 필릭스는 손이 아파 더는 못쓰겠다고 포기를 선언하고는 책상에 그대로 엎드렸다.

 

 

 

 

 

민호는 턱을 괴고 널브러진 필릭스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 시선이 괜히 간지러워 필릭스는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다시 시작하자는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스치는 무릎이 간지러웠다. 필릭스는 이상한 사람에게 이상한 걸 배우려니 자신도 덩달아 이상해지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필릭스는 책상에 엎드린 채로 제 글씨를 찬찬히 읽어내렸다. 첫번째, 특정 인물에 대해 깊이 고민해볼 것. 둘째, 특정 인물을 쉴 틈 없이 생각할 것. 셋째, 특정인물과 오랜 시간 붙어있을 것. 넷째, 특정 인물과 함께 밤을 맞아 볼 것. 다섯째,... 아무리 봐도 다 비슷한 말 같아보여 필릭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민호의 특별과외는 자정이 되어서야 얼추 마무리됐다. 민호가 전수해준 102가지 방법을 요약해보자면, 특정 인물을 계속 떠올리고 좋은 점을 찾으려고 노력하다 보면 저절로 그 사람이 좋아진다는 것이었다. 너무도 당연한 소리를 특별한 비법처럼 가르치는 민호가 조금 웃겨 웃음이 나왔지만 필릭스는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그저 그것들을 공책에 성실히 받아적었다.

 

 

 

 

 

그날 밤, 민호는 필릭스의 룸메이트의 잠자리인 2층 침대 중 위 칸에서 잠을 청했다. 룸메이트는 어디에 있냐는 말에 필릭스는 아랫집에 놀러갔다고 대답했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민호가 다시금 푸핫 하고 웃었다. 필릭스도 진짜 이상하다고 민호의 말에 두 마디 정도를 덧붙였다.

 

 

 

 

 

안녕히주무세요. 필릭스의 굿나잇 인사에 민호가 엉 너도 라고 대답하고 손을 두어 번 휘적거리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민호가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던 필릭스는 민호가 자리에 눕자 방 불을 껐다. 깜깜한 어둠에 제 침대까지 걸어가다가 필릭스는 그만 제 발을 간이책상에 갖다 박고 말았다. 우는 소리를 내는 필릭스에 민호는 말없이 발광 마법을 써 발밑을 비춰줬다.

 

 

 

 

 

민호의 도움으로 침대에 간신히 누운 필릭스는 민호에게 고맙다고 슬쩍 말을 건넸다. 민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필릭스는 들은건지, 못들은건지 알 수 없었지만 역시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는 금새 단잠에 빠져들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민호도 눈을 감았다.

 

 

 

 

 

 

 

제 발밑조차 보이지 않던 어둠은 해가 뜨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필릭스의 머리맡에서 핸드폰도 요란하게 울려댔다. 4분 간격으로 울리는 알람은 필릭스를 깨우긴커녕 민호를 먼저 깨우고 말았다. 필릭스는 잔뜩 까치집이 진 머리칼을 하고는 잘도 잤다.

 

 

 

 

 

민호는 제 상체를 일으키다가 천장에 머리를 박았다. 민호가 제 정수리를 잡고 괴로워하는 동안, 필릭스는 천근만근인 몸을 일으켜 겨우 알람을 껐다. 샤워를 하러 화장실로 들어가는 필릭스의 뒷모습에 민호가 깔깔 웃었다. 까치집이 그 화근이었다.

 

 

 

 

 

샤워를 마친 필릭스는 교복을 입고 밥을 먹으며 머리를 말렸다. 밥이라고 해봤자 후르츠시리얼에 우유를 부어 먹는게 전부였음에도 필릭스는 늘 아침밥을 챙겨 먹었다. 민호는 그런 필릭스를 시종일관 관찰할 뿐, 다른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쁜 아침에 필릭스가 민호를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양치질하며 가방을 챙긴 필릭스는 가방을 맨 채로 제 입을 헹구고는 현관으로 직진했다. 민호는 그런 필릭스를 배웅해줬다. 잘 다녀와. 네. 대답할 정신은 없어 보이는데 용케 대답을 했다. 필릭스는 신발을 구겨신고 문을 열고 나갔다.

 

 

 

 

 

겨우 지각하지 않고 도착한 필릭스는 제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며 제 앞머리를 정리했다. 채 마르지 않은 머리가 아직 축축했다. 필릭스가 대충 제 옷매무새를 정리했을 때, 종이 치고 성실한 담임선생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출석부를 옆구리에 끼고 교실에 들어섰다.

 

 

 

 

 

출석체크를 하고 아침 독서를 하는 게 아침 시간의 루틴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담임선생님은 대뜸 전학생이 왔다는 말을 하고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러자 문 밖에서 교실을 훔쳐보던 전학생이 교실로 들어왔다. 인원이 홀수인 탓에 맨 뒷자리에 짝없이 앉아있던 필릭스는 저 사람이 제 짝임을 확신하고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곧 문이 열리고 교실 여기저기에서 감탄사가 들려왔다. 완전 잘생겼네. 미쳤어 얼굴 좀 봐. 대박이다 진짜. 교탁에 다다른 그 사람은 자기소개를 하라는 담임의 말을 듣고는 싱긋 웃었다. 웅성거림이 조금 커지는 와중에 필릭스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오늘 전학을 오게 된 이민호입니다. 잘 부탁해, 얘들아."

 

 

 

 

 

군더더기 없는 자기소개에 담임은 만족한 표정을 짓고는 민호를 필릭스의 옆자리에 배치했다. 제게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민호와 눈이 마주친 필릭스는 복학을 해서 너희보다 2살이 많다는 담임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민호는 자연스럽게 필릭스의 옆자리 의자를 빼고 앉아 책상 옆에 가방을 걸고 필릭스에게 인사를 건냈다. 안녕, 필릭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느낀 필릭스는 애써 제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안녕이라고 인사했다. 민호는 활짝 웃으며 다시 교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맨 뒷자리에 모여있던 시선이 순식간에 앞으로 쏠렸다.

 

 

 

 

 

담임이 헛기침을 하며 추가 전달사항을 얘기하는 동안 민호는 필릭스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설마 내가 집지키는 강아지 역할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었다. 집 지키는 강아지로는 필릭스의 머리맡에 둔 강아지 인형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민호가 학교에, 그것도 같은 반에 올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탓에 필릭스는 몹시 당황했다. 너무 당황한 탓에 말도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어버버하고있는 필릭스를 보고 씩 웃은 민호가 시선을 선생님에게로 돌렸다.

 

 

 

 

 

넌 누구를 사랑해보고 싶어?

 

 

 

 

 

민호의 목소리였다. 깜짝 놀란 필릭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민호를 쳐다봤지만 민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앞만 보고 있었다. 뒤이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필릭스는 뒷목을 잡을 뻔했다.

 

 

 

 

 

다 마법이니까 그냥 들어.

 

 

 

 

 

필릭스는 냉큼 답을 하려고 했지만 마법을 사용하지 못해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필릭스는 민호가 던진 물음을 곱씹었다. 넌 누구를 사랑해보고 싶어? 제 주변에서 연애를 해본 사람이라곤 옆집누나랑 3주하고 이틀 연애하고 차인 황현진밖에 없었다.

 

 

 

 

 

마땅한 예시가 없으니 고민을 오래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안이었다. 필릭스가 인상을 찌푸려가며 고민을 하는 사이에 종이 쳤다. 교실을 벗어나는 선생님에게 꾸벅 인사를 한 민호는 필릭스에게 고개를 돌린 뒤 물었다. 정했어?

 

 

 

 

 

필릭스는 확신보다는 불안이 더 컸다. 첫사랑에 대한 로망이 조금 있었던 만큼 지금 상황이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제 소중한 첫사랑을 이렇게 넘겨줘도 되는 건가 싶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이 마법사를 따르면 좋은 일이 잔뜩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 또한 마법이겠거니 생각한 필릭스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

 

 

 

 

 

민호의 계획은 이러했다. 첫째, 필릭스의 공략대상인 찬희에게 접근한다. 둘째, 시도 때도 없이 찬희를 관찰한다. 셋째, 찬희를 계속 생각한다. 사람을 사랑하는 102가지 방법을 정확히 준수한 정공법에 필릭스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누군가를 좋아해 보려고 애를 쓰는 건 또 처음이었다. 그런 필릭스를 이해한다는 듯이 민호는 고개를 주억거리기만 했다.

 

 

 

 

 

자신도 좋은 방법을 소개해주고 싶지만 마계 헌법에 따르면 감정은 조작할 수가 없다는 민호의 말에 필릭스는 금방 수긍했다. 결국 이 어리석은 방법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필릭스는 첫번째와 두번째 단계를 동시에 실행에 옮겼다. 찬희와는 어느정도 친분이 있어 접근이 쉬웠다. 민호는 찬희의 옆자리에 앉아 신나게 떠드는 필릭스를 구경했다. 웃으니까 예쁘네. 민호는 그렇게 생각하곤 책상에 엎드렸다. 마법사는 본래 잠을 잘 필요가 없는 몸이었지만 괜히 인간들처럼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필릭스는 천재는 아니었지만 범재였다. 나무랄데없는 학습태도로 평균 이상의 성과를 내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민호가 얘기해준 대로 찬희의 껌딱지가 된 필릭스는 민호는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민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필릭스를 빤히 쳐다봤다. 반짝이는 두 눈이 참 예뻤다. 민호는 제 고개를 두어 번 양옆으로 털고는 책상에 엎드렸다.

 

 

 

 

 

필릭스는 찬희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 지 무척 고민했다. 사실 필릭스와 찬희는 공통분모가 크지 않은 사이였다. 조잘조잘 말이 많은 필릭스와 달리 찬희는 과묵했고 표현도 행동도 작았다. 최소한의 리액션으로 최대한의 표현을 하는 사람. 그게 바로 찬희였다.

 

 

 

 

 

필릭스는 찬희와 대화를 나누며 은연중에 민호를 발견할 수 있었다. 턱을 괴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눈빛, 간간히 맞장구쳐주는 다정한 목소리, 웃을 때 예쁘게 올라가는 입꼬리, 그리고 가볍게 던지는 말장난까지. 어, 민호형 닮았다. 필릭스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본인이 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곤 했다.

 

 

 

 

 

매일 밤, 필릭스는 제 위(이 층침대 중 이 층)에 누워있는 민호에게 자기 전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보고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말했지만 필릭스는 그저 민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귀찮을 법도 한데 민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필릭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맞장구를 쳐줬다. 필릭스가 어느 순간 잠에 빠지면 좋은 꿈을 꾸는 마법을 걸어주고 잘 자라고 속삭여주는 것이 민호의 하루 일과의 마무리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필릭스가 찬희와 짱친이 되자, 민호는 필릭스에게 3단계로 넘어갈 것을 명했다. 시도 때도 없이 찬희 생각을 하기. 필릭스는 여기서도 범재다운 면모를 자랑했다. 필릭스는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에 빠지는 순간까지 의식적으로 찬희의 생각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3단계의 가장 큰 빵꾸는 바로 찬희로 시작한 생각이 정신을 차려보면 민호로 끝나있다는 것이었다. 찬희는 교복이 잘 어울리네. 민호형도 교복 잘 어울리는데. 민호형은 몇 살일까? 혹시 백 살이 넘었을 수도 있을까?

 

 

 

 

 

민호가 들었다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꿀밤을 먹였을 게 뻔해 필릭스는 웃음을 가까스로 삼켰다. 어마어마한 빵꾸덕에 필릭스의 사랑은 큰 진척 없이 흘러만 갔다. 저렇게 열심히 하면 사랑에 안 빠질 수가 없는데,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민호가 필릭스에게 물었다.

 

 

 

 

 

"너 찬희 생각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아?"

 

"네. 저 완전 많이 했어요."

 

"이상하네.."

 

 

 

 

 

어깨를 으쓱인 민호가 필릭스에게 추가적인 플랜을 설명해줬다. 요컨대, 이제 마법의 힘을 빌릴 때가 됐다는 것이었다. 민호는 마법으로 수많은 클리셰같은 상황들을 만들어냈다. 복도를 걷다가 찬희와 부딪혀 손을 잡고 일어서게 한다든지, 찬희의 옆에서 넘어져 단둘이 보건실에 가게 한다든지 말이다.

 

 

 

 

 

필릭스는 민호의 지시에 곧이곧대로 따르면서도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완전 저기압이었다. 다만 본인도 왜 그런지를 몰라 답답해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민호가 자신과 찬희를 엮으려 들 때마다 불쾌한 기분이 발끝부터 스멀스멀 온몸으로 번졌다.

 

 

 

 

 

필릭스는 찬희와 손을 잡고 10cm 거리에서 얼굴을 마주 댔는데도 미적지근한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사랑이란 게 이렇게 어려운 건지 누가 알았겠는가. 평소보다 건조한 표정을 한 필릭스에게 찬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필릭스. 무슨 일 있어? 오늘 표정 완전 별로네."

 

"아.. 그냥 좀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뭔데? 말해봐. 나 고민상담 잘해."

 

 

 

 

 

수상한 마법사한테 잡혀서 너를 좋아하려고 애쓰고 있어 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대충 얼버무리자니 찬희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필릭스는 스스로에게 아주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나는 왜 기분이 나쁘지?

 

 

 

 

 

선택지는 세 가지였다. 1번, 찬희를 좋아할 수 없어서. 2번, 찬희가 날 좋아하지 않아서. 3번, 민호형이 자꾸 내가 찬희를 좋아하게 하려고 해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필릭스의 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갑자기 귀가 빨개지는 필릭스를 본 찬희가 인상을 찌푸리며 필릭스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필릭스는 한참을 뜸 들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누가 나를 자꾸 다른 사람이랑 엮으려고 하는데 기분이 자꾸 안 좋아. 왜 그럴까? 다소 정리가 되지 않은 필릭스의 말을 여러 번 곱씹던 찬희는 잠시 후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

 

 

 

 

 

"질투하네, 너."

 

"어?"

 

"질투하는 거야. 넌 그 사람이 좋은데 자꾸 다른 사람이랑 엮으려고 드니까 기분이 구리잖아."

 

 

 

 

 

찬희의 명확하고 시원한 분석에 필릭스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서 기분이 그렇게 안 좋았구나. 이제야 알았다. 자신이 찬희가 아닌 민호를 좋아하기 때문에 민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행동이 못 견디게 서러웠던 것이었다.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나 이제 어떡해?"

 

"어떡하긴, 누군지는 몰라도 가서 고백해봐."

 

 

 

 

 

어깨를 으쓱이고는 씩 웃는 찬희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필릭스는 보건실을 뛰쳐나왔다. 지금 시간은 9시 15분, 민호는 이미 집에 가 있을 시간이었다. 필릭스는 교실로 달려가 제 가방을 들고는 계속 달려 학교를 벗어났다. 뒤에서 어디 가냐며 소리치는 선생님께 죄송하다고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평소보다 심장이 열 배는 빨리 뛰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온종일 그 사람 생각밖에 안 나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아무것도 안 해도 행복하다는 민호의 말이 필릭스의 귓가를 맴돌았다. 필릭스는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제 마음을 제대로 전할 수는 있을지 걱정이 됐다. 그러나 이미 두근거리는 기분 좋은 설렘이 걱정을 이긴지 오래였다.

 

 

 

 

 

필릭스는 바람을 가르며 민호에게로 달려갔다. 머릿속이 잔뜩 엉켜 무슨 말을 뱉어야 할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느새 제 집 앞에 도착한 필릭스는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도어락을 두드렸다. 손이 벌벌 떨리는 탓에 두 번이나 다시 눌러야 했다.

 

 

 

 

 

민호는 필릭스와 처음 만났던 날 입었던 옷을 입고 있었다. 잠옷이 아닌 체크무늬 코트에 필릭스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현관에서 굳어있는 필릭스에게 민호가 다가섰다. 민호는 아무 말 없이 필릭스에게 제 목걸이를 보여줬다. 그 속은 붉은색 하트로 가득 차있었다.

 

 

 

 

 

 

 

"..축하해. 내가 다 기쁘네. 연애 그거 별거 아니지?"

 

"..."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말하지 못한다. 지금 말하지 못하면 다음 따위는 없다는 생각이 필릭스를 가득 채웠다. 벌벌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가 없어 필릭스는 제 두 손을 맞잡은 채로 등 뒤에 숨겼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떻게 말을 건네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민호에게 고백할 생각으로 가득 찬 필릭스가 민호의 씁쓸한 표정을 캐치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 이래, 고개 좀 들어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형 있잖아요.."

 

"어?"

 

"저.. 찬희랑 연애 안 해요. 저 찬희 안 좋아해요."

 

 

 

 

 

 

 

여느 때처럼 반짝거리는 눈으로 민호를 쳐다보는 필릭스에 민호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민호의 심장이 필릭스의 심장 소리에 맞춰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하는 기대, 혹시나 하는 희망이 민호를 집어삼켰다.

 

 

 

 

 

"제가 좋아하는 건 찬희가 아니라 형이에요. 좋아해요 민호형. 완전 많이 좋아해요.."

 

 

 

 

 

필릭스는 폭탄발언을 하고는 제 얼굴을 두 손에 묻고 울음을 터트렸다. 히끅거리는 소리에 민호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허공을 맴돌던 민호의 손은 어색하게 필릭스의 어깨에 안착했다. 그 손에 당황해 고개를 든 필릭스의 눈앞에 환하게 웃는 민호가 있었다.

 

 

 

 

 

"필릭스같은 울보 나 아니면 누가 받아줘, 그치?"

 

 

 

 

 

멍한 표정을 한 필릭스를 끌어안은 민호가 그의 등을 꽉 껴안았다. 익숙한 온기에 필릭스가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대성통곡을 하는 필릭스에 민호는 그만 울라며 필릭스의 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민호는 제 셔츠 어깨 부근이 젖어드는 걸 느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필릭스는 민호의 품에 안겨 이런 말을 떠올렸다. 첫사랑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필릭스의 누나가 제 첫사랑에게 거하게 차이고 나서 약 석 달 간 달고 살았던 말이었다. 필릭스는 그 말을 두어 번 곱씹어보았다. 누군가에겐 아팠을 첫사랑의 기억이 자신에겐 이토록 달고 마법 같음이 참 감사했다.

 

 

 

 

 

울음소리가 잦아들자 필릭스는 민호의 품에서 벗어나 부끄럽다는 듯이 다시 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모습에 푸스스 웃은 민호가 필릭스의 손을 살짝 거뒀다. 민호는 물음표를 띄운 필릭스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포갰다. 정말이지, 황홀하고 마법같은 첫사랑이었다. 필릭스는 살며시 두 눈을 감았다.

 

 

 

 

 

 

 

 

 

 

 

그날 밤, 필릭스는 뽀로로가 그려진 책상 앞에 앉아 이른바 마법의 노트를 폈다. 무언가를 꼬물거리며 쓰던 필릭스는 이리 오라는 민호의 부름을 듣고는 미련없이 일어섰다. 쇼파에 앉아있던 민호의 옆에 자리 잡은 필릭스는 민호의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대었다. 필릭스가 책상 위에 둔 노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마법사를

사람을 사랑하는 102가지 방법

I Want To See A Brief Future - Sweet Dove
00:00 / 00:00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