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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같은 건 처음이라서

W. 다린

띵동-

토요일 아침부터 초인종 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엄마! 밖에 누구 온 거 같은데.”

“지금 바쁘니까 니가 좀 나가봐.”

 

꼭 이럴때만 나보고 하래. 우리 집에 올 사람이 누가 있더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는데.

 

“내일 옆집으로 이사 올 사람인데 안에 계세요?”

 

무슨 이사? 옆집 이사갔나?

 

띵동- 띵동-

평소에는 안하던 옆집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초인종이 2번 더 울렸다.

 

“네, 잠시만요, 지금 나가요!”

 

침대에 계속 누워있느라 엉망이 된 머리를 손으로 간단히 정리하고 문을 열어보니 어떤 남자가 서 있었다. 그것도 잘생기고 화려한 남자가. 그저 셔츠에 청바지만 입었을 뿐인데도 빛이 날 것 같은 남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수면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있는 내가 조금, 아주 조금 부끄러웠다.

 

“안녕하세요. 저 908호 사는 사람인데 내일 이삿짐이 들어올 예정이라 조금 시끄러울 수도 있어서 미리 양해 부탁드릴려고 왔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어... 그럼 안녕히 계세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내 반응에 살짝 당황했는지 말이 살짝 끊겼다. 하지만 이내 잘생긴 얼굴만큼 친절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할 때 꽤 오래 전에 펌을 했는지 살짝 푸석해 보이는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문이 닫히고 그냥 서 있었다. 뭐지. 나도 몰랐다. 그냥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랑 같은 건 처음이라서

 

 

 

일어나보니 집에 아무도 없길래 편의점에 컵라면을 사러 가는데 엘리베이터에서 어제 그 갈색머리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나를 알아봤는지 인사하는 갈색머리에게 말은 못하고 인사만 했다. 오늘 이사 온다고 그랬지. 목소리를 들으니까 생각났다. 어제는 셔츠에 청바지더니 오늘은 회색 후드에 아디다스 체육복을 입었다. 그냥 집 안에 굴러다니는 거 입은 거 같은데도 잘생겼네. 갑자기 그 생각을 하니까 똑같은 회색 후드를 입은 게 부끄러워져서 모자를 고쳐쓰고 엘리베이터에서 급하게 내렸다.

 

 

 

-

 

 

 

“다녀왔습니다.”

 

신발을 벗을려고 현관을 보니 여태껏 본 적 없던 신발이 있었다. 뭐지 내껀가? 새 거는 아닌 거 같은데. 이 신발 뭐냐고 물어보려는 그 순간 부엌에서 갈색 머리가 튀어나왔다.

 

“어? 너가 그 저번에 문 열어줬지?”

 

뭐야.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 어제 봤던 갈색 머리를 보자마자 사고회로가 정지된 듯 생각도 멈추고 몸도 멈췄다.

 

“용복아 옆집 학생이래. 인사해.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거 같은데.”

“안녕. 우리 인사 세번째하네. 너 이름이 용복이야? 귀엽게 생겼다.”

 

이번에도 인사는 안했다. 물음표로 가득차서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

 

“여기 와서 밥 먹어. 어머니 밥 진짜 잘하신다.”

 

제대로 인사한 건 오늘이 처음인데, 초면에 밥부터 먹으라고 하는 사람도 처음이였다. 나는 다 처음인데 그 사람은 내가 처음이 아닌 것처럼 말했다. 신발을 완전히 벗고 가방을 방에 가져다 놓으며 생각했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그 사람은 엄마가 해 준 밥이 맛있다고 한 게 거짓말은 아닌지 밥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 밥을 먹는 동안 나는 아무 말도 안했다. 누가 보면 내가 옆집 사람이고 엄마하고 저 사람이 가족인 줄 알 것 같다. 그래도 엄마의 질문덕분에 내가 알아낸 정보는 이랬다. 이름은 이민호이고 나이는 21살. 우리집에서 가까운 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며 집은 김포인데 자취에 대한 로망도 있고 집 가까운 곳에서 통학하고 싶어서 자취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자취하는 곳이 우리집의 옆집이라는 것. 대학교 들어갈려면 적어도 국영수 1등급은 나와야 될 텐데. 저 얼굴에 공부도 잘했나보다. 게다가 성격까지 좋은 거 같다. 엄마가 최근에 저렇게 웃는 거 처음 봤다. 요즘에도 옆집이랑 이렇게 친하게 지내나? 분명히 오늘 아침에 이웃끼리 싸움이 나서 결국 살해까지 당했다는 뉴스를 같이 봤는데 엄마는 경계심도 없는 건가? 요즘에 이웃사랑이 있는 곳이 있을까 했는데 그 곳이 우리집일 줄은 몰랐다.

 

 

“저녁 잘 먹었습니다.”

“잘 먹었다니 내가 더 고맙네. 옆 집 사는 것도 인연인데 자주 와요.”

“저야 항상 오케이죠. 용복이도 나중에 또 보자.”

 

내 이름을 불렀다. 용복이라고. 그리고 나중에 또 보자고 했다. 나중에? 언제? 왜? 이상한 사람이 이상한 말만 남기고 갔다.

 

 

“엄마.”

“왜.”

“언제부터 옆집이랑 그렇게 친했어?”

 

비밀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이상한 질문을 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목소리가 들어갔다.

 

“아까 마트 갔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는데 어차피 옆집이라고 짐 같이 옮겨주길래 고마워서 저녁 먹으러 오라고 그랬지. 왜 무슨 일 있어?”

 

얼굴에 티 났나? 근데 뭐가?

 

“아니, 아까 집에 왔을 때부터 표정이 이상해서.”

“그래? 내가 그랬어?”

“민호랑 친하게 지내봐. 성격도 좋고, 잘생겼고, 아까 이야기 들어보니까 공부도 잘하는 거 같던데. 거리 둬서 좋을 거 없잖아.”

 

그렇지. 잘생겼고, 성격 좋고, 공부까지 잘하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서 안 좋을 건 없다. 근데 이상했다. 나도 왜 이상한지 모르는데 어쨌든 이상했다. 그리고 그 이상함을 난 감출 수 없었다.

 

 

민호. 이민호라고 했다. 내가 아는 이민호는 상속자들에 나왔던 배우밖에 없었는데 한 명이 더 생겼다. ‘이민호’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다 잘생겼나? 내 주위에 다람쥐 닮은 애, 강아지 닮은 애, 피자조각 닮은 형은 있었어도 조각상 닮은 사람은 처음이였다. 아 모르겠다. 한숨을 쉬며 침대에 누웠다. 전등 때문에 눈이 부셔서 눈을 감았다. 신경이 쓰여서 이상한 건지, 이상해서 신경이 쓰이는 건지 모르겠지만 갈색머리를 처음 만난 토요일부터 난 갈색머리를 신경 쓰고 있었다.

 

 

 

-

 

 

 

“다녀왔습니다.”

 

집에 들어오자 이제는 익숙한 운동화가 먼저 보였다.

 

“용복이 왔어?”

 

방에서 문이 열리고 갈색 머리가 툭 튀어나왔다. 항상 생각한 건데 저 얼굴은 정말 적응이 안된다. 밖에서 봐도 적응 안 될 얼굴인데 우리집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까 더 적응이 안됐다.

 

 

우리집에서 밥을 먹고 간 이후 나를 제외한 우리 가족과 민호 형은 친하게 지냈고, 과외 알바를 구한다는 민호 형에게 엄마가 나를 부탁했다. 그래서 일주일에 2번씩 우리집에서 형에게 과외를 받게 되었고, 지금 저 형이 우리집에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과외는 꽤 괜찮았다. 설명도 잘해줬고, 옆집이라 모르는 게 있으면 가서 물어볼 수도 있었다. 옆집 과외의 장점이였다. 과외를 받은 덕분에 엄마의 바람대로 형과는 친해졌다. 맘에 들거나 친한 사람에게 더 친하게 대하는 내 성격도 있겠지만 항상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형의 성격이 합쳐져서 한 번 말을 트니까 친해지는 건 금방이였다. 그러나 처음의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유는... 나도 몰랐다. 항상 잘생겨서 그런가. 형을 볼 때마다 심장이 떨렸다.

 

 

“너 작년 3월 모의고사 풀어서 1등급 맞으면 형이 영화 쏠게.”

“음.. 그러면 팝콘도.”

 

이게 아주 지갑 탈탈 털려고 하네. 나도 학생이라 돈 없거든? 콤보 사달라고 했더니 형은 돈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왕 영화도 보여주는 거 제대로 사줘요. 형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영화 보여달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요. 영화 안 보여준다고 할까봐 눈치 보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하니까 내 볼을 꼬집었다.

 

“와. 너 내가 귀여워서 사주는 줄 알아.”

 

상품이 있어서 그런지 뭐든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는 그 주 주말에 영화를 보기로 했다.

 

 

 

 

-

 

 

 

띵동 -

 

“문 열려있어. 들어와.”

 

집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밤새 고민했던 게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친구가 아닌 사람 집에 들어가는 건 처음이라 초인종을 누르고 무슨 멘트를 해야 될 지 고민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형, 저 왔어요. 문 열어주세요.’와 ‘용복이 왔어요. 문 열어주세요.’ 등등 5개의 문장을 노트에 써놓고 시뮬레이션까지 해가며 고민하던 어젯밤의 내가 좀 창피했다. 문을 열어둘 지는 몰랐는데. 하여튼 이상한 사람이다.

 

“도둑 들어오면 어쩔려고 문을 열어놔요.”

“도둑 들어와 봤자 가져갈 거 없어.”

 

우리집이랑 똑같은 현관인데 새로운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져갈 게 없다는 말을 증명하듯 거실에는 소파랑 티비만 있었다. 그렇게 안 생겼는데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건가? 주위는 온통 하얀색 아니면 검은색, 회색이였다.

 

“도둑이 형 납치해가면 어떡해.”

“그러게. 나 납치해가면 우리 귀여운 용복이가 많이 속상할 텐데.”

“뭐래. 문이나 잠궈요.”

“뭐 마실 거라도 줄까?”

“괜찮아요. 어차피 영화관 갈 건데 거기서 먹을래요.”

“나 옷만 입으면 되니까 앉아서 좀만 기다려.”

 

집 구조도 똑같은데 다른 집에 온 거 같지. 벽지 색깔도 비슷하고, 가구 배치도 비슷한데. 아무리 궁금해도 남의 집 투어를 하기는 싫기도 하고 예의도 아닌 거 같아서 거실 소파에 앉아 눈으로만 둘러봤다.

 

집 냄새다. 냄새가 달랐다. 소파에 앉아 한참을 고민한 내가 내린 결론이였다. 여기서는 민호 형 향수 냄새가 났다. 집에서 나는 거니까 향수가 아니라 집 냄새인가? 분명한 건 이 냄새가 싫지 않았다. 나쁘지 않았다.

 

 

 

-

 

 

 

“형 입장하려면 몇 분 남았어요?”

“어... 한 10분?”

“그럼 저 화장실 좀 다녀올 테니까 팝콘 좀 들고 있어요.”

“오냐. 빨랑 다녀와.”

 

볼일을 보고 손을 씻는데 손에서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이상해. 형이랑 영화 보는 게 이렇게 떨릴 일인가? 전에 창빈이 형이랑 영화를 봤던 게 생각났다. 창빈이 형도 내가 좋아하는 형인데 그 때는 이렇지 않았다. 그때는 그냥 영화가 맘에 들었고, 하필 밤이라 더 신났었다. 이상해. 이제는 입에 붙어버린 ‘이상해’를 말하면서 거울을 봤다. 내 얼굴을 본다고 이 기분이 설명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확실한 건 이 기분이 싫지 않았다.

 

 

화장실을 나와서 아까 있던 자리를 보니까 음료수만 있었다. 어디 갔나? 주위를 둘러보니까 에스컬레이터 앞에 있었다. 뭐지? 집에 뭐 두고 왔나? 자리에 혼자 있던 음료수를 들고 형한테 갈려고 했는데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더 다가가려고 하니까 여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형이 보였다. 내가 모르는 여자와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 형을 보니까 화장실에서 느꼈던 그 떨림이 사라졌다. 계속 있던 떨림이 사라지니까 허전했다. 그냥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형이 대화를 마치고 돌아와도, 영화관에 입장해서도 나는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우선, 그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전여친인가? 근데 전여친이랑 저렇게 웃으면서 말을 한다고? 내 주위에 전애인이랑 웃으면서 말하는 미친 놈은 한지성뿐이였다. 그럼 오늘 처음 본 사람일 수도 있잖아. 근데 처음 본 사람이랑 왜 말을 해? 번호 따는 건가? 헐. 그건 안돼.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꽉 차있어서 당연히 영화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같이 데이트하는 장면이 아까 봤던 형과 여자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한숨만 나왔다.

 

 

 

 

-

 

 

 

“영화 재밌었지.”

 

아뇨. 형 때문에 집중도 하나도 안됐고 지금 울고 싶어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할 수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용복아. 영화관에서 무슨 일 있었어? 나 봐봐.”

 

아무 말도 안하고 집 앞 공원까지 온 순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이사 온다고 초인종을 누르고 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왔던 그 순간부터 형을 좋아했다는 걸. 우리집에서 밥 먹을 때 느꼈던 이상함이 처음 느껴보는 호감이였다는 걸. 화장실에서 내 손을 씻을 때 느꼈던 떨림이 설레고 긴장돼서 떨렸다는 걸. 늦은 밤 가로등 아래에서 내 볼을 두 손으로 잡고 걱정 어린 표정을 하며 자기를 보라는 지금의 형을 좋아한다는 걸.

 

“야 너 울어? 뭐야 왜 울어.”

 

어이없게도 이 모든 걸 알자마자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웃기게도 이 눈물과 함께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말이 술술 나왔다.

 

“형 진짜 나쁜 거 알아요? 아까 화장실 갈 때 팝콘 좀 들고 있으라고 했더니 자기 혼자 사라져서는 다른 여자랑 웃으면서 말하고 있고. 나는 형때문에 영화도 못 봤는데 자기 혼자 영화 재밌게 보고. 진짜 나빠요. 이거 없던 걸로 하고 나중에 영화 한 번 더 봐요. 또 나는 형 좋아하는데 그것도 몰라주고. 물론 저도 오늘 알았지만.. 그래도 제가 이렇게 말했다고 이사 가면 안돼요.”

 

마음속에 있던 말을 다 꺼내고 나니까 후련해진 동시에 후회가 밀려왔다. 아 망했다. 나 진짜 미쳤나봐. 이사 가야하나? 우리집 돈 없는데 어떡하지. 형은 대학생이니까 학교 자퇴는 안 해도 되겠지? 나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는 동시에 혀 깨물어 죽는 게 나을 지, 공원에 있는 호수에 빠져 죽는 게 나을 지 고민했다. 내가 밀려오는 후회에 오이피클처럼 절여지고 있을 때 큭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너...”

 

이게 웃겨? 난 쪽팔려서 죽고 싶은데? 큭큭 거리며 웃고 있는 형을 보니까 이제 형도 죽이고 싶었다.(물론 진심은 아니였다)

 

"너 진짜.. 귀엽다."

 

네? 갑자기요?

 

“...너 몰랐어? 나 너한테 엄청 티냈던 거 같은데.”

 

그게 무슨 뜬금 없는 소리냐고 물어보는 듯한 눈빛을 읽은 듯 형이 말했다. 내가 뭘 모르고 형이 뭘 티내는데요.

 

“너한테 계속 귀엽다고 했는데 몰랐어?”

 

약간은 당황하고 여전히 웃는 목소리로 형이 말했다. 내가 귀엽다고? 생각해보니 많이 들었던 거 같기도 하고...

 

“그리고 나 귀여운 거 좋아해.”

 

형의 말을 듣는 순간 1월 1일도 아닌데 종소리가 들렸다. 아 너 진짜 귀엽다. 형은 내 볼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웃으며 날 안아줬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상황 파악을 못하는 와중에 좋아서 소리 지를 뻔 했다. 우리 사귀는 건가? 상관없다. 나보고 귀엽다는데 뭔 상관이야. 입에서는 입김이 나오고 추워죽겠는데 형한테 안겨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따뜻했다. 그리고 우리의 겨울도 점점 따뜻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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