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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죽도

W. 차차

여자친구과 헤어진 필릭스는 통 무기력했다. 하루종일 우중충해있었고 점심도 걸렀다. 친구인 도원이 평소 필릭스가 좋아하던 음료수를 사다줘도 고마워 한 마디만 하고 계속 책상에 엎드려 있을 뿐이었다.

"야, 필릭스. 우리 오늘 학교 끝나고 시내 나갈거거든." "난 안가." "너때문에 가는거야."

 

 

 

 

도원은 친구들 몇명을 더 데리고 필릭스와 함께 시내로 향했다. 필릭스의 기분을 전환시켜주기 위해서. 하지만 필릭스는 가게 하나를 지나칠 때 마다 죽을 상을 하고는 가게를 쳐다봤다.

"여기 예은이가 좋아했는데."

"야 필릭스한테 김예은 소개시켜준 사람 손 들어."

"나."

"그 손으로 니 뺨 때려."

 

 

 

 

몇걸음 뒤쳐지며 추억에 젖어있는 필릭스를 챙기는 건 도원의 몫이었다.

 

"야 우리 게임이나 하자."

"뭔 게임."

"가위바위보 진 사람 벌칙."

 

 

 

 

반 박자나 늦게 냈으면서 필릭스가 가위바위보에서 졌다. 필릭스는 안그래도 죽을상인 얼굴을 더 구기며 잉잉거렸다. "저기 저 교복입고 있는 사람 보이지? 저 사람 번호 따오기." 가위바위보게임을 제안했던 성민이 필릭스의 어깨를 잡고 교복을 입고 있는 어떤 남자를 가리켰다. 필릭스는 도원에게 살려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도원은 그저 머쓱하게 웃을 뿐이었다.

 

 

 

 

"저기요... 혹시 번호 좀 주실 수 있으세요?"

 

필릭스는 성민의 요구로 억지로 웃으며 교복을 입은 남자에게 휴대폰을 건냈다. 빨리 싫다고 해. 빨리. 라며 속으로 생각했지만 그 남자는 재밌다는듯이 웃으며 필릭스의 휴대폰을 가져가 자신의 번호를 저장하고 다시 필릭스에게 돌려주었다. 필릭스는 지금이게 뭐지 싶었다.

 

 

 

 

                                  안녕하세요...

                                  아 저 아까 번호 따갔는데요

                                  친구들이랑 게임해서 벌칙으로

                                  그런거거든요

1  오후 9:32               기분 나쁘시면 죄송해요

 

 

 

 

 

필릭스는 얼굴에 팩을 붙인 채로 휴대폰 액정을 톡톡 두드렸다. 아까 번호 따간 사람에게 예의상 뭐라도 보내야 할 것 같았다. 톡을 보낸지 1분도 채 안된 것 같은데 카톡 하는 알림이 울렸다.

 

 

 

 

아ㅋㅋㅋㅋ 그래요?

근데 그쪽 귀엽던데

몇살이에요? 학교는?          오후 9:32

 

 

 

 

저 열일곱살이고 칠오고 다녀요. 필릭스는 대충 답장을 보냈다. 남자의 이름은 이민호였고 학교는 필릭스의 바로 옆학교에 다닌댔다. 나이는 필릭스보다 한 살 더 많다 그랬다. 밤이 새도록 민호와 톡을 주고 받은 탓인지 필릭스의 얼굴엔 피곤함이 가득했다. 학교가 시작할 때 부터 끝날 때 까지 쭉 책상에 엎드려 자기만 한 필릭스를 깨워 같이 하교하는 도원이었다. 그렇게 자놓고도 필릭스는 피곤한지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며 하품을 쩍쩍 했다.

 

 

 

 

"안녕?" 필릭스와 도원이 교문과 가까워지자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필릭스는 하품때문에 촉촉한 눈가를 비비다가 목소리의 주인을 올려다 보았다.

"어..." "필릭스 안녕. 친구도 안녕?" 민호였다. 민호는 예쁘게 웃어 보였다. "형 여긴 왜..." 필릭스는 도원의 눈치를 보며 민호에게 물었다. "너 보고싶어서~ 너 내 번호 따갈때는 계속 고개 숙이고 있어서 얼굴 제대로 못 봤잖아?" "그건 맞는데..." "어디 가? 집?" "네." 민호는 필릭스를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도원에게는 먼저 가보라며 웃었다.

 

 

 

 

민호는 하루가 멀다하고 꼬박꼬박 필릭스네 학교에 찾아왔다. 항상 도원을 먼저 집에 보냈고 필릭스를 집에 데려다 주었다. 하루는 친구를 데리고 필릭스네 학교로 왔는데 민호의 표정이 영 별로였다. 민호의 친구는 민호 못지않게 번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필릭스? 안녕?”

민호의 친구라는 사람은 웃으며 필릭스에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필릭스는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다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민호의 친구는 재연이랬다. 권재연인지 김재연인지 강재연인지. 사실 필릭스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민호가 재연과 함께 필릭스의 학교로 찾아 온 이후로 재연은 민호 없이도 필릭스네 학교에 잘도 찾아왔다.

낯간지러운 말도 잘 했다. 필릭스의 개그코드도 잘 맞추었다. 재연은 민호가 하던 것 처럼 필릭스를 집까지 바래다주곤 했다. 버스에서 옆자리에 붙어 앉았고 이어폰을 나눠 꼈다.

“릭스 잘 들어가~ 형 생각해~” 재연은 필릭스가 집에 들어가는 걸 꼭 보고 등을 돌렸다. 가끔은 필릭스의 볼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필릭스가 집까지 들어가는 걸 지켜보고는 휴대폰을 귀에 댔다. 필릭스에게 했던 사탕 발린 말들과 행동들이 필릭스만을 향한 게 아니라는걸 보란듯이 그랬다.

“어, 현지야. 오빠 학교가 늦게 마쳐서. 금방 갈게.”

 

 

 

 

필릭스와 재연이 처음으로 놀러 가는 날이었다. 원래 민호와 셋이 놀기로 했던 거였는데 민호가 열감기를 앓는 탓에 둘만 놀게 된 것이다. 재연은 최대한 동네와 먼 곳으로 놀러 가자그랬다. 둘의 데이트 코스는 주로 실내였다. 재연은 마스크를 올려 꼈고 평소에는 쓰지도 않는 안경까지 썼다. 하늘이 어둑어둑해지자 이제 집에 갈까? 하는 재연이었다. 

지하철 옆자리에 딱 붙어 이어폰을 나눠 꼈다. 지하철역을 빠져 나오니 하늘이 아예 새까맸다.

"바래다 줄게." "형 늦었는데 오늘은 그냥 가요. 부모님 걱정하실텐데." 필릭스는 가방 끈을 꽉 붙잡고 말했다. "괜찮아~ 지금 집 가도 아무도 없어. 내 걱정하지말고." "그럼 제가 형 집까지 바래다 줄래요." "형 괜찮아. 쬐깐한게."

재연은 필릭스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어깨동무를 한 채로 자연스럽게 필릭스네 집으로 향했다. 필릭스가 재연에게 집까지 바래다 준다는 말을 하자마자 재연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이 보였지만 필릭스는 잘못봤겠거니 하고 넘겼다.

 

 

 

 

재연은 민호에게 거짓말 하는 일이 많아졌다. 야자 한다고 거짓말을 치고 민호보다 먼저 필릭스의 학교에 가 필릭스를 만나거나 했다. 필릭스가 왜 민호는 요즘 안보이냐 물으면 걔 너 요즘 질렸대~  이제 안귀엽대~ 하는 재연이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민호가 이미 필릭스와 재연이 떠난 자리에서 몇십분이나 서서 필릭스를 기다렸다는 걸 필릭스는 절대 알 길이 없었다.

 

 

 

 

민호는 오랜만이라며 혼자 집에 가고 있던 필릭스의 앞에 나타났다. “김재연. 없더지? 너네 학교에.” 어떻게 알았는지 민호는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웃고는 있었는데 밝은 표정은 아니었다. 걔 너 요즘 질렸대. 이제 안 귀엽대. 재연의 목소리가 필릭스의 귓가에 웅웅 울렸다. “네.” “걔랑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마, 릭스야.” 민호는 친구가 아닌 아예 남을 얘기하듯이 말했다.

“왜요?” “너 상처 받는거 보기 싫다 나는.” 민호는 필릭스를 보던 시선을 거두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제 맘이에요 형.” “그래 네 맘이지.” “형이 신경 안써도 된다는 말이에요.” 필릭스의 말투가 날카로웠다.

민호는 필릭스를 한 번 바라보고 허, 하며 웃었다.

“걘 너 말고도 여기저기 신경쓸 곳 많아.” 민호는 벽에 기대있던 상체를 일으키고는 필릭스의 옆을 지나쳤다.

 

 

 

 

 

필릭스는 휴대폰을 들고 불안한듯 손톱을 물어 뜯었다. 꼬박꼬박 연락을 받던 재연과 연락이 끊긴지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민호와 연락이 끊긴지는 좀 오래 되었다. 민호가 필릭스의 아파트로 찾아왔던 날 필릭스가 먼저 연락을 끊었다. 

학교가 마치고 힘 없이 터덜터덜 교문으로 걸어가는 필릭스였다. "야." 교문에 기대 서서 시선을 필릭스에게 고정하고 있는 민호였다. 민호는 얼굴에 피딱지를 여러개 달고 있었다. 입술도 터져 있었다. 필릭스는 당황하는 것도 잠시 형 얼굴이 왜 그러냐며 차가운 손으로 민호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필릭스가 재연을 만나기 전 그러니까 한참 예전처럼 민호와 필릭스는 필릭스네 아파트 놀이터 그네에 나란히 걸터 앉았다. "형 얼굴은 왜 그랬어요..." 필릭스가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왜 궁금한데." "오랜만에 보는데 얼굴이 그 모양이잖아요... 그리고 재연이형이 민호형이 저 이제 질렸다고 그랬다던데."

민호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그 새끼랑 한 판 했어. 짜증나서." 민호는 바람 빠지는 웃음 소리를 내며 필릭스를 쳐다보았다. "어이없지." "네." 필릭스도 민호를 쳐다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형 왜 연락 안됐어요." "어... 그냥 좀. 여러 문제가 있어서? 가족간에." 구라였다. 다른 여자애들이랑 형들이랑 놀아나느라 바빴던 거였다. 필릭스도 구라라는걸 알고 있었지만 별 말 하고싶지 않았다. 민호를 만났던 날 재연이 자신에게 민호와 갈라두려고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 자신과 연락이 끊겼던 일주일동안 다른 학교 형들과 여자애들과 술을 마시고 개판을 벌이다가 폰을 잃어버려서 연락이 끊겼다는것까지 모두 민호에게 들었다. 

 

 

 

 

“형은 진짜 왜 그러고 사냐.” 보다못한 현진이 학교 옥상 난간에 기대어 재연에게 던진 말이었다. “내가 뭐.” “맨날 민호형이 먼저 좋다고 한 애들 이리저리 휘두르고 다니다가 버리면 좋냐고.” “알 바냐?” 재연은 입에 담배를 문 채로 현진을 꼴쳐보았다. “담배도 작작 펴. 뒤질거면 혼자 뒤지던가 애들 다 있는데서 피고 지랄.”“새끼 말하는 거 봐라.” 재연은 한 대 칠 것 처럼 현진을 쳐다보았지만 현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민호형 불쌍해 뒤지겠어. 그 형이 왜 형이랑 계속 붙어있어주는지 이해 못하겠다.” 현진이 옥상에서 나간 후 옥상에는 재연 혼자만이 남았다.

 

 

 

 

필릭스는 안그런척 했지만 민호에게 모든 걸 듣고 속앓이를 심하게 했다. 끙끙 앓아눕기까지 했다. 누구에게 들었는지 필릭스에게 너 아파서 학교도 안왔다는 말을 들었다며 학교도 째고 필릭스의 집까지 뛰어 온 민호였다. 민호는 필릭스에게 사 온 죽을 떠먹여주었다. 필릭스는 잠깐이라도 지금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이 재연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자신을 원망했고 민호는 아무것도 모르는 필릭스를 보러 가고싶다고 했을 때 재연을 필릭스의 학교에 데려간 자신을 원망했다.

 

 

 

 

필릭스는 재연에게 고백이라도 해보겠다고 했고 민호도 네가 하고싶은 대로 하는 게 맞다며 말이라도 해보랬다. "형 저 할 말 있어요." 재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재연은 운동화를 질질 끌며 필릭스의 집 앞으로 향했다. "형 저 형 좋아해요." 재연의 표정이 읽을 수 없게 변했다. "너 다 알잖아." 예상 외의 답에 필릭스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재연을 올려다 보았다.

"너 내가 너한테 어떤 구라를 깠는지 다 알잖아. 이민호가 너한테 아가리 턴거. 내가 그거 하나 예상 못할 정도로 대가리가 안돌아가진 않아." 재연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재연의 말에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 반박도 못하고 그대로 재연의 뒷모습만 바라 볼 뿐인 필릭스였다. 

 

 

 

 

이제 어떻게 되는거지? 필릭스는 한참이나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형. 형. 하고 톡을 보냈지만 보지 않는 재연이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재연과 처음 놀았을 때 재연이 필릭스에게 뽑아준 인형을 안고 잉잉 우는 필릭스였다. 처음 민호의 옆에서 자신에게 인사를 하던 재연이 떠올랐다. 필릭스의 눈물로 인형이 점점 젖어갔다.

 

 

 

 

필릭스는 팅팅 부운 눈을 비비며 교문을 나섰다. "필릭스!"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눈이 왜." 민호였다. 민호는 필릭스의 볼을 붙잡고 이리저리 쳐다보았다. "까였어요..." 기어들어가는 필릭스의 목소리에 어이구, 하면서 필릭스의 볼을 쓰다듬는 민호였다. 왈칵 터져나오는 눈물에 필릭스는 민호의 어깨에 고개를 박고서 소리를 내며 울었다. 민호는 필릭스의 고개를 들어 품에 안고 몇분이나 서서 필릭스의 뒷통수와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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