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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해도 될까요

W. 굿데

그는 언제나 그 곳에 있었다.

 

 

 

필릭스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볼쇼이 발레단 입단. 최연소 발레리노로써 읽기와 쓰기를 마치기 전에 첫 공연을 마무리. 이미 꿈을 이룬 그에게 기자들은 물었다. 필릭스 군은 나중에 뭐가 되고 싶어요? 주근깨가 점점이 박힌 귀여운 인상의 소년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A star."

 

별이 되고 싶다고, 소년은 그렇게 말했다.

 

 

 

May I kiss you?

 

作. 굿데

 

 

 

필릭스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인한 하반신 마비. 언젠가 발레 역사의 한 획을 그을 것이라 총망받던 소년은 비운의 발레리노라는 타이틀을 단 채 어머니의 고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휠체어에 앉은 앙상한 손이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술과 마약에 쩔은 손으로 셔터를 눌러대는 기자들의 소음에 머리가 아팠다. 카페테리아에 가면 그거대로, 커피를 마시면 그거대로 기자라는 사람들은 서사를 만들어 '17살 소년의 참극', '떠오르던 별의 몰락' 등의 제목을 붙여다가 기사를 써냈다. 테이블을 앞에 두고 신문을 읽는 어머니의 손 역시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헤드라인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천재 발레리노의 앞길을 막은 어머니의...'

 

"Mother."

 

그래서 천재 소년은 다시 싱긋 웃었다. 저보다 더 말라버린 어머니의 손을 붙잡으며, 웃었다. 그건 어머니 잘못이 아니었잖아요. 몇 번을 말해드려도 결과는 같았다. 어머니는 자신을 참을 수 없어했다. 정확히는,

 

"Felix..."

 

I wish I hadn't given birth to you if I knew this would happen.

 

이럴 줄 알았다면 너를 낳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 참극의 결과인 소년을. 참을 수 없어했다.

 

 

 

"이름은 정했니?"

 

한국에서의 첫 식사였다. 공항까지 버선발로 마중 나온 이모는 필릭스를 보자마자 끙, 하는 소리를 내며 툼툼한 두 팔로 그를 힘껏 안아주었다. 릭스, 너 정말 많이 컸구나. 5년이 지났는데도 이모는 한결같았다. 언제나 밝았고, 언제나 선했다. 짐을 던져버리듯 필릭스를 맡긴 어머니는 고개를 까딱하는 것으로 인사를 마쳤다. 끔찍하게 뒤틀려버린 언니를 보는 이모의 시선은 따뜻했다. 언제든 와. 밥 한 끼 하고 가. 두어 번 고개를 저은 어머니는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필릭스를 보더니, 서툰 포옹으로 작별을 알렸다. 아이 미스 유. 입가에 맴도는 말을 필릭스는 뱉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마냥 웃기만 했다. 얼른 오세요, 어머니. 많은 뜻을 함축한 미소는 어머니에게 닿지 못하고 힘없이 추락해 버렸다. 안쓰러운 표정으로 모자의 이별을 지켜본 이모는 자신이 아는 최상의 위로로 필릭스를 달래기로 했다. 그 결과 필릭스는 난생 처음으로 엄청난 규모의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다. 고기며 찌개며 이것저것 푸짐하게 한 상을 차려낸 이모는 이제야 좀 숨이 트인다는 얼굴로 밥을 한 술 뜨며 필릭스에게 물었다. 이름은 정했니? 라고.

 

"리...용,복?"

 

사실 필릭스는 이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귀화를 결정하고 아무렇게나 받아온 이름이었다. 어머니는 무조건 이름에 '용' 자가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고, 피터는 남은 생에 복이 넘쳐야 하니 '복' 자도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복용'은 다른 뜻이 있으니 '용복'이 낫지 않겠니. 그래서 필릭스는 기쁘게 그 이름을 받아야 했다. 저는 이제 용이 될 일도 없고, 복이야 최고의 악운을 뽑아버렸는데 두 자가 이름에 있어봐야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그는 기쁘게 용복이가 되기로 했다. 허나 참 우습고 구수한 이름이었다. 이름을 들은 이모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아낸 이모가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그 이름을 말해주진 마."

 

저는 필릭스 리. 한국 이름 이용복입니다. 라고 해. 그게 낫지 않겠니? 릭스.

 

 

 

학교에 나가기까지 꼬박 반 년이 걸렸다. 이것저것 적응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써버린 릭스는 한층 더 낯선 또래의 아이들과 학교를 다녀야 했다. 한숨을 포옥 내쉰 릭스가 바퀴를 굴렸다. 지금은, 교실에 들어갈 시간이었다.

 

 

 

"야. 오늘 전학생 온단 거 들었냐?"

 

"그 외국 살다 왔다는 애?"

 

"야 근데 걔가 걔래. 그. 비운의..."

 

 

 

"비운의 뭐?"

 

 

 

일순 정적이 흘렀다. 그런 존재였다. 이민호는. 입꼬리를 당겨 씨익 웃는 그 미소에 아이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시, 시끄러웠어? 미안. 촉새처럼 떠들던 형철이 살살 꼬리를 내리며 시키지도 않은 사과를 했다. 아작아작 풍선껌을 씹던 민호가 푸우, 하고 크게 풍선을 부풀렸다. 낮게 내리깐 눈이 선득하게 빛났다. 형철은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짝, 소리를 내며 풍선을 터뜨린 민호가 별안간 형철의 머리채를 확 잡아챘다.

 

"계속 말해봐. 응? 비운의 뭐?"

 

별 이유는 없고. 좀 시끄러워서. 그리고 제 옆 자리에 앉을 놈이 누군진 궁금해서. 순수한 악의로 가득찬 눈이 벙글벙글 웃었다. 잡아챈 형철의 머리채를 휙 놓아버린 민호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야. 형철아.

 

"너는 입을 싸닫던지, 머리라도 잘 감고 다니던지."

 

개기름 쩌네, 더러운 새끼. 영문 없이 머리를 쥐어뜯긴 형철은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며 자리에 앉았다. 주변 아이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그런 형철을 외면했다. 이 반에서만큼은 이민호가 왕이었다. 4교시가 다 끝나갈 무렵에 학교를 와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이민호였고, 몇 주 정학을 먹어도 놀랍지 않은 것이 이민호였다. 끝장나게 잘난 몸이신 이민호가 딱 하나 가지지 못한 게 있다면 바로 싸가지였다. 이민호는 싹바가지가 없었다.

 

"그래도 계속 씨부려 봐. 내 짝인데. 유명한 애야?"

 

한 학기가 다 지나가도록 이민호의 옆자리가 비워져있는 이유 역시 그것이었다. 이민호의 짝이 된 아이들은

 

2주를 채 못 버티고 자퇴서를 써내거나 전학을 가곤 했다.

 

 

 

그런 이민호도 당황이라는 건 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휠체어를 타고 들어온 이국의 소년을 본 이민호의 미간이 일순 꿈틀거렸다. 간단하게 목례를 한 소년이 짤막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필릭스 리. 한국 이름은 이.. 용복입니다."

 

잘 지내봐요. 이름을 듣는 순간 몇몇 아이들은 탄식을 내지르며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진짜 맞네? 나 티비에서만 봤어. 그... 비운의...

 

발레리노.

 

발레리노?

 

휠체어를 굴리며 민호의 옆자리에 온 릭스를 보며 아이들은 동정과 연민의 시선을 보냈다. 가엾긴, 전학오자마자 이민호의 옆자리가 걸리다니. 운도 지지리 없지... 저를 향해 쏟아지는 무수한 시선의 무게를 당연하다는 듯 감내한 릭스는 교과서를 펼친 채 수업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이 정도는 익숙했다. 며칠 정도 조용히 지내면 다시 수그러들 관심이다. 민호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런 릭스를 쳐다보았다. 그가 휠체어에 앉아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외국인이어서도 아니었다. 그가 용복이라는 우습고 촌스러운 이름을 가졌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냥...

 

"너..."

 

아, 시발.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민호는 그대로 교실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이민호, 이민호! 너 자리에 안 앉아? 이민호! 저를 부르는 꼰대의 목소리 따윈 무시한 지 오래였다. 마지막으로 문을 닫으며 마주친 선득한 시선을 생각했다. 아니, 처음 교실에 그가 들어왔을 때 짓고 있던 표정을 생각했다. 왜? 아니, 어떻게? 필릭스 리. 이용복이라는 그 아이는,

 

 

 

죽은 사람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호주 사람이라고?"

 

"응. 나중엔 러시아에서 살았지만."

 

"나도 호주 살았었어. 내가 반장이니까 모르는 거 있으면 앞으로 나한테 물어봐."

 

방 찬이야. 크리스라고 불러도 돼. 민호가 떠난 교실은 생각보다 평화로웠다. 릭스는 적당히 사무적이고 적당히 다정한 찬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급식실로 내려가기 불편한 릭스는 도시락을 싸 와 먹어야 했다. 말라 비틀어진 매점 빵을 뜯어먹던 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짝 말인데, 불편하면... 바꿔도 돼. 나랑 바꿀래? 릭스는 비어버린 옆자리와 미세하게 떨리는 찬의 입꼬리를 바라보다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난 맨 뒷자리가 편해. 괜찮아. 내색은 않으려 애를 쓰지만 릭스의 눈에는 다 보였다. 이 아이. 안심하고 있구나. 릭스와 점심을 먹어주는 것 역시 자리를 바꾸라는 것과 함께 떨어진 반장의 의무였으리라. 릭스는 이어 가볍게 웃었다. 있잖아.

 

"앞으론 같이 점심 안 먹어줘도 돼."

 

빵. 맛 없잖아. 맞지? 나는 이모가 요리를 좋아하셔서 이게 더 좋아. 계란부침을 떠먹는 릭스의 얼굴을 보며 후에 찬은 그렇게 말했다. 속이 없는 건지, 깊은 건지 모르겠더라고. 아무튼 나쁜 애는 아닌 거 같아 - , 라고.

 

의무로 다가온 호의를 거절한 릭스는 자연스럽게 혼자가 되었다. 나쁘지 않았다. 필요할 땐 몇몇 아이들이 자처해서 휠체어를 끌어주었고 이따금 제 호기심을 채우고자 말을 걸어오는 아이도 있었다. 아이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던 이민호는 불퉁한 얼굴로 자리에 돌아와 한참이나 릭스의 얼굴을 보더니, 말 한 마디 섞지 않고 그대로 엎드려버렸다. 아이들은 영문 모를 이민호의 고요함에 환호했다. 그렇게 적당히 평화로운 여름이 가고 있었다.

 

 

 

사건은 방학을 일주일 앞둔 목요일에 일어났다.

 

"너지?"

 

제 앞 자리에 앉아있던 형철의 지갑이,

 

"체육시간에 교실에 있는 거 너밖에 없는데 그럼 누가 가져갔다는 거야?"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것이다.

 

 

 

당연하게도 의심의 눈초리는 내내 교실에 앉아있는 릭스에게 쏟아졌다. 처음 당해보는 도둑 취급에 릭스는 손을 내저으며 항변했다. 내가 앉아있었던 건 맞는데, 나 잠깐 잠들었어. 진짜야. 그냥 내 자리에서 잠만 잤어. Just sleep. 나 약 먹으면 원래 깊게 자. 오늘 약 먹어서 잠들었어. 나 아니야... 긴 변호도 아이들에겐 그저 변명으로밖엔 들리지 않았다. 호주 도둑놈, 얼어죽을 발레리노. 민호 앞에선 살살 기던 형철이 릭스에겐 눈알을 부라렸다. 너. 내일까지 내 지갑 도로 갖다놔. 아님 진짜 콩밥 먹을줄 알아. 늘 평정심을 유지하던 릭스도 이 때 만큼은 미소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나 아니야. 형철아. 억울함에 말라버렸던 눈물이 도로 쏟아져내릴 것 같았다. 안절부절 못하는 릭스의 얼굴을 보며 형철이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이게 다 가정교육 제대로 못 받은 탓이지. 안 그래, 필릭스?"

 

니 다리 네 엄마가 잘라먹은 거라며.

 

 

 

뚝.

 

이성이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간 참고있던 릭스의 분노가 쏟아져내렸다. 한순간 눈빛이 탁해진 릭스는 손에 잡힌 아무거나 집어다 형철의 얼굴에 던져 버렸다. 하필이면 손에 잡힌 게 제 철제 필통이었고, 하필이면 그 필통은 형철의 머리를 강타했다. 악 소리를 내며 머리를 움켜쥔 형철의 이마에서 피 한 줄기가 내렸다. 피를 본 형철은 그대로 휠체어에 앉은 릭스의 멱살을 잡고 그를 바닥으로 끌어 내려버렸다. 이 씨발, 호주에서 온 좀도둑 새끼가. 내가 틀린 말 했냐? 틀린 말 했어? 한평생 발레만을 해왔던 하얀 손가락이 형철의 옷자락을 휘어잡았다. 아니야, 아니야. 틀려. 틀려. 틀리다고. 우리 어머니는! 바닥에 부딪힌 허리께서부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전기처럼 휘어올라왔다. 이를 악물로 비명을 참아낸 릭스가 주먹을 내리꽂는 형철의 얼굴에 머리통이라도 부딪힐 심산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이, 씨발,"

 

뭣도 아닌 새끼가.

 

한참 제 위에 올라타 주먹질을 하던 형철의 몸이 힘없이 고꾸라진 건. 한순간이었다. 어느새 교실로 돌아온 민호가 욕을 짓씹으며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민호를 본 형철은 저승사자를 본 것 마냥 눈을 휘둥그레 뜨고 미, 민호야 라며 죽어가는 소리를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민호는 사정없이 형철을 걷어찼다. 니가, 인간, 인간이냐, 시발, 새끼야? 한 자 한 자를 말할 때마다 민호의 운동화가 형철의 몸을 짓이겼다. 이러다 사람 죽지 싶은 찬이 민호를 말리지 않았더라면 형철이 기절할 때까지 민호의 발길질은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머리를 쓸어올린 민호가 욕지거리를 뱉으며 주머니에서 형철의 지갑을 꺼냈다.

 

"체육이 강당 치우다 주웠다더라."

 

물건 제대로 간수하고 다녀, 형철아. 우리 형철아. 엄한 사람 도둑놈 만들지 말고. 아연실색한 표정을 하고 지갑을 받아든 형철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미안. 미안.

 

"한심한 새끼."

 

퉷, 하고 침을 뱉어낸 민호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릭스를 안아들고 교실을 나가버렸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여기저기 얻어맞아 볼썽사납게 일그러져 있었다. 아프냐? 가물가물해져가는 정신을 부여잡은 릭스가 떨리는 손으로 저를 안아든 민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어...

 

"Thank you."

 

그리고 끝. 그대로 눈을 감아버린 릭스는 민호의 품에서 기절해버렸다. 차라리 자라, 용복아. 이상하리만치 낯선 제 짝의 품이 포근했다. 낯선 냄새와 낯선 품. 그 낯설고 낯선 것들의 향연에서 릭스는 눈을 감았다. 민호는 안아든 릭스의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혀를 끌끌 차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귀신은 아니네."

 

따뜻하니까. 멀어져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아이러니하게도 퍽 어울렸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간 민호가 도착한 곳은 양호실도, 교무실도 아닌...

 

"야. 일어나. 정신 좀 차려봐."

 

육상부가 사용하는 체육창고 옆 숙소였다.

 

 

 

따뜻하다.

 

눈을 뜬 릭스는 제 허리 밑에서 뜨겁게 덥혀진 찜질팩을 꺼냈다. 온돌 찜질팩. 이런 걸로 달래질 통증은 아니다만 나름 고심했을 깜찍한 간호법에 릭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뭐야. 정신이 들자 얼굴에 조심스레 붙여진 반창고들의 감촉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먼 발치에서 거즈를 꺼내온 민호가 불퉁한 얼굴로 제 입가를 닦아내고 있었다. 뭘 이렇게 많이 쳐맞았냐. 김형철 그 좆밥 새끼한테.

 

"너..."

 

나 싫어하지 않아?

 

왠지 용기가 생겼다. 릭스는 고요한 얼굴로 저를 간호하는 민호에게 한 마디를 건넸다. 어. 니 존나 싫어해. 돌아온 대답은, 역시 불퉁했다. 처음 볼 때부터 존나 싫었어. 왜? 왜 그렇게 내가 싫었는데?

 

"니가..."

 

나랑 존나 닮았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민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릭스 역시 아무 말 않고 그의 침묵을 거들었다. 구태여 부연하지 않았고 구태여 요구하지 않는 이 관계가 편안했다. 에이, 하고 옆에 드러누운 민호가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뭐 들을래?

 

"Giselle."

 

아돌프 아담이 지은 거... 그래서인지 릭스는 민호와 '그 노래'를 듣고 싶었다. 아. 싫어. 지루해. 툴툴대면서도 민호는 유튜브에 들어가 지젤을 치고 있었다. 릭스는 쿡쿡 웃으며 눈을 감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공연한 노래였어... 옅게 웃는 그 얼굴이 퍽 위태로워 보여서, 민호는 손으로 그 미운 얼굴을 덮어 버렸다. 닥치고 들어. 더럽게 지루하네. 굳은살 박힌 투박한 손이 제 눈가를 가리자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릭스는 앙상한 손을 들어 그 투박한 손 위에 제 손을 올렸다. 그래, 더럽게 지루하지. 뼈마디만 남은 마른 손의 감촉을 느끼며 민호가 속삭였다. 야. 이용복.

 

"죽은 사람처럼 웃지 마."

 

필릭스 리가 아니라 이용복으로 살려고 온 거잖아. 그러니까...

 

죽은 사람처럼 웃지 마. 여기에서까지...

 

유령으로 살지 마.

 

아스라히 멀어져가는 민호의 목소리를 들으며 릭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오, 지젤. 잃어버린 발레 슈즈의 모습을 쫓으며 눈을 감았다. 필릭스 리가 아니라 이용복. 민호야. 그게 뭐가 다른데. 민호야. 필릭스가 이용복이고 이용복이 필릭스인데. 민호야... 필릭스가 죽어버렸는데. 나는 뭘까. 내가 유령이 아니면.. 뭐란 말이니. 옅어져가는 제 자신을 느낀 릭스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방울져 흐르는 눈물을 닦아낸 민호가 손을 떼고 천천히 그 가냘픈 몸을 한 품에 안고 등을 쓸어내렸다. 이용복이 죽긴 왜 죽어. 여기 숨 쉬고 있는게 니가 아니면 누군데. 너...

 

살아있잖아.

 

많은 것을 함축한 짤막한 위로 속에서 릭스는 섧게 울었다.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릭스를 쓰다듬으며 민호는 가만히 그 건너편을 응시했다. 겹쳐진 두 몸 뒤에 아무렇게나 쏟아져내린 옷가지 아래. 그 아래에는 으깨진 전국 체전 트로피의 잔해가 숨겨져 있었다.

 

"더 자."

 

이용복. 더 자... 위로를 건네는 이민호의 이름 석 자가 적힌, 지난날의 금색 트로피. 민호는 그 트로피를 마저 제 속에 묻어버리며 필릭스를 위로했다. 그 서툴고 진한 위로 속에서 릭스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나란히 정학과 봉사 처분을 받았다.

 

"하여튼 좀생이 새끼. 지 잘못한 건 쏙 빼고 쳐 일렀네."

 

"너 대체 욕은 언제 고칠래?"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한여름, 창틀을 닦던 릭스가 여전히 거친 민호의 목소리에 가벼운 핀잔을 걸었다. 내가 틀린 말 했냐? 툴툴대는 이민호와 함께 하는 청소 봉사는 나름, 유쾌했다. 그 이민호가 러시아에서 온 비운의 발레리노를 끔찍하게 싸고 돈다는 소문은 날개를 달고 빠르게 퍼져나갔다. 졸지에 이민호 말곤 말 붙여주는 사람이 없는 신세가 되어버린 릭스는 매일 이민호와 함께 음악을 듣거나 점심을 먹었다. 1교시부터 4교시까지 릭스의 옷깃을 잡고 잠든 민호는 점심시간이 되면 귀신같이 일어나 삼각김밥을 까먹었다. 이따금 릭스가 도시락을 나눠주려 했지만 워낙 입이 짧은 이민호는 너나 쳐먹으라며 미운 대답을 건네곤 했다. 나쁘지 않았다. 릭스에게도, 민호에게도.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은 서로에게 뒤섞이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이따금 묘한 기류가 흐르는 순간을 제외하곤 서로에게 어색한 시간은 없었다. 어쩌다 눈이 마주쳤을 때 이상하게 얼굴이 붉어지는 순간이라던가, 이상하게 밤마다 서로의 얼굴이 생각나는 순간이라던가.

 

"...민호야?"

 

지금처럼. 어쩌다가...

 

"그... 얼굴... 좀..."

 

릭스를 휠체어에서 옮겨줘야 할 때, 품 속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이라던가.

 

릭스와 나란히 얼굴이 붉어진 민호는 그대로 릭스를 휠체어에 앉혀주고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화장실로 달려가버렸다. 얼굴 전체가 붉게 달아올라있었다. 민호는 얼굴에 찬물을 끼얹으며 되뇌었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용복을? 내가? 예쁘장하니 생겨서... 그런 거야. 걔가 너무 예쁘게 생겨서 내가 착각하는 거야... 릭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괜히 천장을 바라보며 손부채질을 하던 릭스는 볼에 스친 손 끝에서부터 느껴지는 열기에 화들짝 놀라 얼굴을 책상에 파묻고 말았다. 미쳤어. 미쳤어. 여름의 마법에 걸렸을 뿐이다. 우정을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귀는 둘 다 어쩔 수 없었다.

 

이용복을,

 

이민호를,

 

좋아하는 걸까.

 

참으로 복잡다단한 여름날의 봉사가 지나가고 있었다.

 

 

 

사랑을 깨닫는 것이

 

애석하게도

 

사랑이 아닐 때가 있다

 

그와 눈을 마주하는 것이 아닐 때가 있다

 

그를 안아보는 것이 아닐 때가 있다

 

애석하게도 그런 사랑은

 

이별의 순간

 

깊은 곳에서 뛰쳐나와

 

눈물로 나타나게 된다

 

애석하게도

 

애석하게도.

 

"Lee..."

 

"...Mother?"

 

장장 몇 개월만에 다시 만난 모자의 사이는 건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못 본 사이 더 볼품없이 말라버린 어머니의 모습에 릭스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출 수 없었다. 바깥에 햇볕이 쨍쨍한데도 어머니는 숄을 두르고 있었다. 요는 이러했다. 네 다리를 낫게 해주신다는 물리치료 신경의학과 선생님을 찾았단다. 릭스. 러시아로 돌아가자. 다시 발레를 할 수 있게 될 지도 몰라.

 

"But, I..."

 

차를 한 모금 마신 어머니는 그대로 일어나 주머니에서 짤막한 메모를 꺼냈다. 모레 아침 6시. 첫 비행기를 타고 갈 거야. Lee. 너를 죽여버렸다는 이 지옥에서 엄마를 구해줄 마지막 기회란다. 그 때나 지금이나. 릭스는 제 꿈이 산산조각나던 그 때를 떠올렸다. 백지장처럼 질린 릭스의 얼굴을 쓰다듬은 엄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서버렸다. Mother! 울음에 가득찬 릭스의 절규는 이번에도 어머니에게 닿지 않았다. 이번에도,

 

"이모."

 

"...릭스?"

 

"휠체어를, 끌어주세요."

 

 

 

"Mom! Stand there! (엄마! 거기 멈춰주세요!) "

 

"Lee?"

 

"Why do you always have your own way? (왜 엄마는 언제나 엄마 마음대로예요?)

 

Neither you nor I have ruined my life. ( 엄마도, 나도 내 인생을 망치지 않았어요.)

 

I am not a Valerino of tragedy. (나는 비운의 발레리노가 아니예요.) "

 

It's me, Mom. I'm just a Felix. It's Lee Yong-bok.

 

 

 

나는 그냥 이용복으로 살고 싶어요.

 

 

 

 

 

...

 

...네가 그렇게 살면,

 

엄마는, 죽, 이 지옥에서 살아야 해. Lee.

 

........ 엄마를 도와주련.

 

 

 

 

 

이용복이 이상하다.

 

민호는 평소처럼 대충대충 책상을 끌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창틀을 닦는 릭스의 손이 느렸다. 아니, 느린 건 언제나 그랬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더 느렸다. 중간중간 답지 않은 한숨을 쉬는 것까지. 도합 여덟 번째 한숨을 내쉴 무렵 결국 참지 못한 민호가 릭스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야.

 

"너 뭐야?"

 

꺼방한 눈짓으로 저를 쳐다보는 민호를 보던 릭스가 돌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민호야. 우리.

 

"땡땡이 칠까?"

 

 

 

민호가 휠체어를 끌어줄 때면 릭스는 말로 못 할 쾌감을 느꼈다. 민호는 정확히 릭스가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강도로만 휠체어를 밀었다. 다시 말해, 휠체어를 미는 것 치고는 광속으로 달렸단 이야기다. 순식간에 학교를 빠져나간 둘은 그대로 학교 근처의 연못가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저를 돌아보는 사람들의 뜨악한 시선 따위는 민호가 대신 씹어주었기에 릭스는 마음껏 소리를 지르며 그 스피드를 즐길 수 있었다. 민호야. 야하. 더. 더 달려. 더 더 더.

 

"그러다 나 뒈져, 멍청아."

 

민호는 마음 한 구석에 밀려오는 불안감을 애써 떨쳐버린 채 릭스의 손잡이를 잡고 냅다 달렸다. 국가대표도 될 수 있었던 다리를 이렇게 써먹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이 발레 멍청이. 그래도 한 쪽 입꼬리가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었는지 민호의 얼굴에도 한가득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달리자. 용복아. 저기까지 가자.

 

 

 

"야. 니가 음료수 사."

 

"많이 힘들었어?"

 

"그럼 이따만한 걸 갖고 달리는데 안 힘들었겠냐."

 

이걸 진짜. 헥헥 숨을 몰아쉬는 민호를 보며 릭스는 쉴 새 없이 웃었다. 뒷정리고 뭐고 다 던져버리고 도망쳐온 둘은 나란히 팬돌이를 쪽쪽 빨면서 벤치에 앉아 있었다. 여름날의 습하고 더운 공기가 연못가에 내리고 있었다. 릭스는 천천히 그 빛나는 연못을 보다가, 땀에 젖은 머리칼을 털어내는 민호를 바라보았다.

 

"나 떠나."

 

그리고 담담하게 폭탄을 내려놓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민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파란색 팬돌이를 쪽쪽 빨아먹다가 감질난다는 듯 뚜껑을 뜯어버렸을 뿐이었다. 벌컥벌컥 팬돌이를 마셔버린 민호가 천천히 릭스를 마주보았다. 눈물은 제가 흘려야 마땅한 상황인데, 그 적막 동안 소리없이 언제 그렇게 운 건지. 새빨갛게 부어있는 눈가가 애처로웠다. 이 상황에서 제가 소리를 지르거나 눈물을 흘려대면 이 가녀린 몸뚱이가 기절해버릴 것 같아서. 민호는 눈물을 속으로 삼켰다. 삼키고 삼키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입을 꼭 말아쥐고 아슬아슬하게 울음을 참던 릭스가 결국 먼저 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미안해. 민호. 미안해. 나도 가기 싫은데, 나도 가기,

 

"야."

 

"..응?"

 

"다녀오면... 이 발에 슈즈 신은 거 볼 수 있냐?"

 

너무도 뜻밖인 반응에 릭스는 눈물을 떨구며 멍하니 입을 벌리고 민호를 쳐다보았다. ...슈즈? 발레 하려고 가는 거잖아. 너. 그럼 내 앞에서도 그거 보여줄 수 있냐고. 지젤인지 뭔지... 나도 볼 수 있냐?

 

"...Of course."

 

"재수없게 영어로 대답하냐."

 

눈물로 가득한 릭스의 눈가를 닦아주며 민호는 말했다. 그럼, 떠나. 담백한 그 인사에 릭스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꼭. 올게. 꼭. 나 꼭.

 

"야. 그 전에 나 소원 하나만."

 

"..소원? 무슨?"

 

"있잖아."

 

 

 

 

 

"May I kiss you?"

 

 

 

눈물로 가득한 키스였다. 릭스는 하염없이 울었고 민호는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눈을 꼭 감은 이국의 소년을 한 가득 제 눈에 담으며 민호는 릭스에게 키스했다. 위로하듯 옭아매는 민호에게 릭스는 한가득 쏟아져내렸다. 한참을 키스하던 민호는 그 애절한 눈에 입맞춘 후, 릭스의 신발을 벗겨 상처가 가득한 미운 발을 어루만졌다.

 

"그냥 보내는 거 아니야."

 

"민호야."

 

"비행기 타러 갔다가... 무서우면, 다시 나한테 불시착해도 돼."

 

그리고 그 발에, 그 미운 발에 입을 맞췄다. 다시 만날 땐 이 죽은 발에 생기가 돌아 있길 바라며. 그리고 네 일부인 필릭스가... 다시 살아나길 바라며.

 

"난 항상 여기서 기다릴테니까."

 

말을 마친 민호의 어깻죽지를 잡은 릭스가 다시 키스했다. Of course. 숨죽여 속삭인 릭스의 마지막 대답을 들으며 민호가 그를 끌어안았다. 깊고 덜큰한 키스는 습도로 가득차있었다. 그래. 그 순간.

 

우리는 서로에게 불시착하기로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이용복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필릭스 리 로 데뷔한 5살의 천재 발레리노, 17살에 불의의 사고로 하반신 마비라는 불행을 만났지만 끈질긴 재활로 3년만에 부활한 기적의 발레리노. 대표작인 지젤 공연을 무슨 일이 있어도 한국에서 하겠노라 발표한 고집 센 발레리노. 공항에 도착한 용복은 제 이름 앞에 고집불통이라는 낯선 수식어가 붙은 것에 웃음을 지으며 셔터 세례를 받았다. 여유롭게 싱긋 웃는 그의 다리는 굳건하게 땅을 딛고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가볍게 목례하며 기자들 사이를 빠져나간 용복이 한국의 공기를 맡았다. 한겨울의 한국에선 습기 대신 눈 냄새가 났다. 하얀 눈 냄새를 한껏 맡으며 한 발 한 발 걸어나간 용복의 발걸음이, 한 순간 멎었다.

 

"...왔구나."

 

3년이 지났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손에 가득했던 짐이며 트렁크를 냅다 집어던진 용복은 달리기 시작했다. 멀찍이 서 있었지만 한눈에 제 마음으로 들어온 그 사람을 향해.

 

언제나 그 곳에 있었던 그 사람을 향해.

 

 

 

"Long time no see."

 

이거 맞냐? 영어식 인사. 여전히 꺼벙한 미소를 짓는 민호의 품에 한달음에 달려간 용복이 그를 껴안았다. 민호의 몸에서 나는, 민호 냄새가 났다. 해사하게 웃으며 눈을 접은 용복이 민호에게 물었다. 다른 수억 개의 말 보다. 보고싶었다는 말보다 이 말이 먼저 나왔다. 민호.

 

 

 

 

 

 

 

May I kiss you?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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